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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 정국의 혼란과 민족의 각성

[3] 정국의 혼란과 민족의 각성

심해 가는 당파 싸움

두 차례의 왜적의 침입을 겪고도 귀족들은 여전히 당파 싸움에 몰리어 나라를 어지럽혔다.

난이 끝나자 정권을 잡았던 북인(北人)은 대북과 소북으로 갈리어 파벌 싸움을 일삼았고, 인조 반정으로 집권한 서인(西人)과 오랫 동안 서인에게 눌려 지내던 남인은, 효종의 제사 문제를 가지고 서로 맹렬한 싸움을 벌이다가 정권은 한때 남인이 잡았다. 그러나 다시 서인의 세력이 강해지더니 그들도 송시열 일파와 젊은 선비들 사이에 틈이 생겨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져서 다투었다. 이러한 당파 싸움은 좀체로 없어지지 아니하므로 영조(英祖)는 불편 부당의 입장에서 사색 당파를 골고루 등용하는 탕평책(蕩平策)을 썼으나 큰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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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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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살림을 위한 개혁

외적의 침입으로 흩어진 나라의 제도와 경제를 바로 잡아서 국민 생활을 안정시키려는 노력이 영조 때 나타나기 시작했다.

우선 국방을 튼튼히 하기 위하여 군대 제도를 5군영으로 재편성하고 군대의 훈련을 위하여 훈련 도감을 설치하였으며, 삼수병(三手兵)을 훈련하게 되었다.

세제(稅制)도 개혁하여 대동법(大同法)이 시행되었다. 대동법이란 그 때까지 지방 특산물을 바쳐 오던 공납 제도는 관리들이 중간에서 부정을 하거나 수송⋅저장 등이 어려워 쌀로 대신 내도록 한 것이다. 대동법은 처음에 이이가 주장하였고 이원익(李元翼)⋅김육(金堉)과 같은 사람들이 경기⋅강원⋅전라도 지방에 시험적으로 실시하더니, 1676년에는 전국적으로 시행하였다. 영조 26년에는 균역법(均役法)을 실시하여 군포(軍布)를 감하여 주었고, 인조 때부터 만들었던 상평 통보도 숙종 때부터 많이 유통하게 되었다.

인도⋅중국⋅일본 등지에는 16세기부터 서양 문물이 전해졌으나, 우리 나라에는 18세기를 전후해서 서양의 문물이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우리 나라에 들어온 서양 사람은 선조 때의 마리, 인조 때의 벨트브레, 효종 때의 하멜 일행 36명이 있었으나, 문화적으로 공헌한 바는 없었다. 오히려 이광정(李光庭)⋅정두원(鄭斗源)⋅김육(金堉)⋅소현 세자(昭顯世子) 등 우리 나라 사람이 중국을 통해서 서양 문물을 받아 들였다.

서양 문화가 도입되자 주자학을 대상으로 한 이론적인 학문에 반대하고, 우리 실생활에 필요한 여러 문제를 연구하게 되어 우리 나라 문화 활동에 새 기운이 돌았다. 선조 때 이수광(李晬光) 등에 의하여 시작된 이 새로운 기풍은 그 후 김육 등에 의하여 발전하였고, 한백겸(韓百謙)⋅유형원(柳馨遠)⋅이익(李瀷)들은 경학보다는 역사⋅지리⋅과학을 중요시하는 실학파(實學派)의 선구자가 되었고, 정조 때에 많은 실학자를 내는 데 기반을 닦았다.

이러한 학문 연구의 새로운 경향은 문학에까지도 영향을 미쳐 한글로 적은 서민 문학이 발달하였다. 시가(詩歌)에 정철(鄭澈), 시조(時調)에는 신흠(申欽)과 윤선도(尹善道), 소설에는 홍 길동전을 쓴 허균(許筠) 등이 나왔다.

《주요 용어》

노론, 소론, 탕평책, 비변사, 대동법, 균역법, 상평 통보, 실학파

◇ 연습 문제 ◇

1. 사화의 원인은 무엇인가?

2. 당쟁의 영향은 어떠하였는가?

3. 왜란은 왜 일어났으며, 왜란의 영향은 어떠하였는가?

4. 실학이란 무엇이며, 실학을 대표하는 이를 들어라.

5. 당쟁의 원인은 무엇이며 어째서 그렇게 오래도록 계속되었는가에 대하여 생각하여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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