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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원 6. 세계의 움직임과 우리 나라의 근대화
  • Ⅲ. 우리 나라의 근대화를 위한 노력
  • [1] 나라의 개방

[1] 나라의 개방

국내 정세와 일본

대원군은 나라의 문을 굳게 닫고 쇄국 정치를 고집하였으나, 마침내 왕비 민씨 일파에 의하여 내몰렸다. 민씨 일파는 대원군의 정치를 반대하던 유림 세력을 앞세우고 대원군을 몰아 내기 위하여 온갖 수단을 다 썼던 것이다.

이 때 일본은 에토(江戶) 바쿠후가 무너지고 메이지 유신(維新)으로 국내 정치를 정돈하여, 미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와 수호 조약을 맺은 다음, 우리 나라에도 수호할 것을 요구하여 왔으나 대원군이 거절한 바 있었다. 일본의 일부 정치가는 한국을 치자고 우겨서 내분까지 일어났으나, 다시 기회를 엿보기로 하고 일단 주저앉았다.

병자 수호 조약

대원군이 정계에서 물러난 지 2년 후 일본 군함 운양호(雲揚號)가 강화도 앞 바다에 접근하여 포격을 가한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것은 일본이 한국과의 사이에 문제를 일으켜 수교를 맺는 구실을 찾으려고 꾸민 사건이었다.

일본은 이 사건을 구실로 쿠로타(黑田淸隆)를 전권 대사로 내세우고, 군사력을 배경으로 강화도에서 협상을 강요했다. 정부에서는 쇄국에서 개국으로 기울어지고 있던 터이라 12개조의 조약을 맺고 나라를 개방하였다(1875). 이것을 병자 수호 조약 또는 강화도 조약이라고 한다.

이 조약에서 우리 나라에 와 있는 일본인은 일본 법률에 의하여 재판을 받기로 하는 내용에 합의했다. 이것은 치외 법권(治外法權)의 불법적인 조약이라 아니할 수 없고, 첫번째 외교에서 그릇된 점이었다.

조선이 나라를 개방하자, 지금까지 기회만 엿보고 있던 여러 나라들과도 조약을 맺게 되어 미국(1882)을 비롯하여 영국⋅독일⋅이탈리아⋅러시아⋅프랑스와도 통상 조약을 맺었다. 이로써 우리 나라는 국제 무대로 진출하여 근대화의 길을 재촉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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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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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문물 제도의 수입

새로운 문화를 받아 들이기 위하여 우리 나라 정부에서는 일본과 청에 시찰단을 파견하기로 했다. 1881년에는 어윤중(魚允中) 등 십여명을 신사 유람단이라 하여 일본에 보내어서 각종 시설을 시찰시켰다. 한편 영선사(領選使)라는 유학생을 골라 청에서 신식 무기의 제조법과 조련법을 배워 오게 하였다. 쇄국 이래 처음으로 새 문화에 접한 그들은 행정⋅교육⋅공업⋅군사 각 방면을 살펴 보고, 귀국 후 우리의 제도를 고쳐 보려 했다.

그러나 일부 유학자들을 중심으로 한 보수주의자들의 반대가 있어 개화 운동의 앞날이 복잡해질 것이 내다보였다.

임오 군란

보수파와 개화파의 첫 충돌이 드디어 일어났다. 1882년에 신식 군대에 몰린 구 군대가 봉급인 급량미 배급의 분쟁을 계기로 난을 일으켰다. 민씨 일파의 정객을 살상하고 개국 후 새로 편성된 신식 군대인 별기군을 공격하여 일인 교관을 죽이고 일본 공사관을 부셨다. 민비도 간신히 충주로 피신해 갔다.

이것을 수습하기 위하여 고종은 대원군을 다시 불러 들이니 모든 제도가 개국 이전으로 돌아갔다. 임오 군란으로 보수파는 다시 정권을 잡았으나, 일본은 무력으로 위협하며 조선 정부에 강경한 태도로 나왔다.

한편 청은 이 때를 이용하여 세력을 펴고자 재빨리 군대를 서울로 보내고, 대원군을 강제로 데려 갔으며 적극적으로 정치에 간섭하게 되었다. 조정에서는 일본과 제물포 조약을 맺고 배상금을 주기로 하였다. 박영효(朴泳孝)가 수신사로 건너 갔는데, 태극기는 이 때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이로부터 청의 간섭이 심하여 외교 고문을 두고 군대도 청 나라식으로 훈련시켰고, 또 청 나라의 권고로 서양 여러 나라와 통상 조약을 맺었다.

갑신 정변

임오 군란 이후 청의 원조를 받고자 하는 사대당(事大黨)과 일본의 세력에 의지하려는 개화당(開化黨)으로 대립하였다.

청이 외국 세력에 몰리는 것을 보자, 독립당은 세력을 잡으려고 우정국 사건(1884)을 일으켜 사대당을 몰아내었다(갑신 정변). 신분의 평등을 내걸고 제도를 개혁하여 재정을 튼튼히 하고자 하였으나 청 나라 군대의 출동으로 김옥균⋅박영효 일파는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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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균
김옥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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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정부에서는 일본의 내정 간섭과 폭동의 조종을 나무라고 한성 조약을 맺었다. 청과 일본의 관계는 더욱 복잡하여져서 일본의 이토오 히로부미(伊藤博文)와 청의 리훙장(李鴻章)은 톈진 조약을 맺고, 조선에서 다 같이 군대를 철수시킬 것을 약속하고 군대를 들여올 때에는 서로 사전에 통고하기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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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훙장
리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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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용어》

우정국 사건, 치외 법권, 개화파, 보수파, 신사 유람단, 영선사, 우정국, 독립당, 사대당, 한성 조약, 톈진 조약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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