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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학교 국사 2차
  • 단원 7. 두 차례의 세계 대전과 우리 나라
  • Ⅰ. 제1차 세계 대전과 민족의 시련
  • [1] 제국주의의 충돌

[1] 제국주의의 충돌

제국주의의 나타남

19세기 말에 이르러 전기와 석탄을 이용한 근대 공업이 급속도로 일어났다.

유럽 여러 나라는 많은 원료와 넓은 시장을 얻기 위하여 식민지를 가지려고 서로 다투었다. 이와 같이 자기 나라의 부강만을 위하여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남의 나라를 침략하는 것을 제국주의라고 한다. 약한 나라는 강한 나라에 짓눌려서 신음하였고, 부강한 나라들은 서로 대립하기 시작하였다. 이 제국주의 정책을 먼저 쓴 나라는 영국⋅프랑스⋅미국⋅독일 등이고 아시아에서는 일본을 들 수 있다.

이러한 험악한 공기를 부드럽게 하기 위하여 만국 평화 회의(1899~1907)를 헤이그에서 열고, 1896년에는 세계 올림픽을 개최하였으나 좀처럼 누그러지지 않았다.

아프리카의 분할

암흑 대륙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어 온 아프리카의 모습이 19세기 말부터 리빙스턴⋅스탠리 등의 탐험가에 의하여 알려지게 되자, 제국주의 여러 나라들은 다투어 식민지를 개척하고자 나섰다.

영국은 수에즈 운하를 프랑스에서 사들이고(1875), 이어 이집트를 보호국으로 만들었다. 영국은 다시 수단을 거쳐 남쪽의 케이프타운과 연결짓는 남북 종단의 정책으로 남아프리카 전쟁을 일으켜, 그 땅을 네덜란드로부터 빼앗은 후 남아 연방을 만들었다(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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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에즈 운하의 개통(1869년 10월에 완성하여 그 해 11월에 개통식을 보았다.)
수에즈 운하의 개통(1869년 10월에 완성하여 그 해 11월에 개통식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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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는 알제리⋅모로코에서 사하라 사막을 거쳐 콩고에 이르고 다시 마다가스카르 섬으로 뻗는 동서 횡단 정책을 썼다.

이 밖에 독일은 서남 아프리카와 또한 동부 아프리카를 차지하고, 벨기에는 콩고 지방을 얻었다. 이탈리아는 이디오피아로 진출하려다가 실패하고 소말리아와 트리폴리를 점령하였다.

이와 같이 짧은 시간에 사하라 사막을 제외한 모든 땅은 모조리 유럽의 식민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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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의 분할(1876~910)
아프리카의 분할(1876~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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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다시 태평양으로 나와 18세기 말에 쿠크의 탐험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오스트레일리아를 1901년에 영국이 자치령을 만들고, 다시 뉴우지일랜드와 파푸아⋅보르네오 섬의 일부도 차지하였다. 마국은 알래스카를 사들이고 쿠바를 빼앗고 하와이를 차지했다. 범미 회의(汎美會議)가 열리고 파나마 운하를 개통하여 태평양과 대서양을 가깝게 단축시킨 것도 이 때이다.

삼국 동맹과 삼국 협상

식민지가 가장 많은 영국이 세력을 떨치었으나, 19세기 말에 독일이 머리를 들고 일어났다. 빌헬름 2세와 비스마르크는 보호 무역과 범 게르만주의로 해외에 손을 뻗치기 시작하여 여러 나라를 놀라게 하였다. 아프리카 식민지 쟁탈전에 있어서나, 태평양의 섬에서도 영국과 독일은 항상 충돌하게 되었다. 독일의 비스마르크는 러시아를 누르기 위하여 오스트리아에 접근하고 다시 이탈리아를 끌어 들여 삼국 동맹을 맺었고(1882), 뒤에 루마니아를 참가시켰다.

이것을 본 프랑스는 러시아와 동맹을 맺었고(1895), 영국도 지금까지 중립을 지키던 명예로운 고립을 독일 진출을 막기 위하여 버리게 되었다. 먼저 독일과 사이가 나쁜 프랑스와 친선 관계를 맺고 다시 러시아와 손을 잡으니 이로서 삼국 협상이 성립되었다. 동맹측과 협상측은 대립이 심하여지고, 다투어 가며 군비를 확장시켰으니, 독일과 영국은 모로코 문제로 더 한충 긴장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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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 동맹과 삼국 협상
삼국 동맹과 삼국 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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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칸 문제

독일은 19세기에 발칸 반도로 진출하여 터어키로부터 바그다드 철도 부설권을 얻었다. 러시아가 발칸을 노리게 되자 이 곳에서 슬라브주의와 범 게르만주의가 맞서게 되었다.

당시의 터어키는 내란이 심하고 외국 세력의 간섭으로 기를 펴지 못하였다. 이에 청년 터어키당이 혁명을 일으켜, 헌법을 지킬 것과 영토의 보전을 국왕에게 약속받았다(1908).

이 틈에 불가리아는 독립하고, 오스트리아는 터어키 영토를 차지하고, 이탈리아는 아프리카의 터어키 영토인 트리폴리를 빼앗았다. 발칸 제국은 동맹을 맺고 제1차 발칸 전쟁을 일으켜 터어키를 격파하여 유럽에 남아 있는 터어키령을 다시 찾았다.

터어기로부터 빼앗은 영토 분배 문제로 세르비아와 불가리아 사이에 다시 싸움이 일어나니 이것이 제2차 발칸 전쟁이다. 알바니아는 영세 중립국이 되고 불가리아가 항복함으로써 발칸 전쟁은 일단 끝이 났으나 발칸 반도에 평화가 찾아온 것은 아니었다. 더 남쪽으로 남하하려는 러시아를 오스트리아가 막았고, 서남 아시아의 독일 세력은 수에즈 운하를 위협하여 전쟁의 위기를 조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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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회의 이후의 발칸 반도
베를린 회의 이후의 발칸 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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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용어》

만국 평화 회의, 수에즈 운하, 범미 회의, 파나마 운하, 보호 무역 정책, 삼국 동맹, 삼국 협상, “명예로운 고립”, 범 게르만주의, 발칸 전쟁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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