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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 제1차 세계 대전과 베르사이유 조약

[2] 제1차 세계 대전과 베르사이유 조약

대전의 경과

1914년 6월, 세르비아의 한 청년이 보스니아의 수도에 온 오스트리아의 황태자 부처를 죽인 사라이보 사건이 원인이 되어 두 나라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고, 다시 동맹국과 협상국이 잇달아 싸움에 가담하였다.

독일은 즉각 중립국인 벨기에로 진군하여 프랑스에 쳐들어갔고, 동부에서는 힌덴부르크가 러시아군을 격파하고 바르샤바를 함락시켰다. 발칸에서는 불가리아가 동맹국에 가담하여 세르비아를 점령하고 동맹군이 우세하였다.

영국이 독일에 선전하고 프랑스의 페탱이 독일군을 몰아 내면서, 전국은 연합군에 유리하게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영국 해군에 놀란 독일은 1917년 1월부터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선언하고 연합군의 물자 수송을 막으려 하니, 중립을 지켜 왔던 미국이 참전하여 동맹군은 더욱 불리하게 되었다. 동맹군은 차츰 단결이 무너지고 독일에서도 전쟁 반대 운동과 혁명이 일어나, 1918년 11월에 독일⋅오스트리아의 황제가 물러나고 마침내 4년 동안에 걸친 제1차 세계 대전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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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 대전 때의 탱크
제1차 세계 대전 때의 탱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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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 대전 때의 연합군 진지
제1차 세계 대전 때의 연합군 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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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영국⋅프랑스⋅미국이 중심이 되어 파리에 모여 평화 회의를 열었다(1919년 1월).

그 해 6월에 조인된 베르사이유 조약에서, 독일은 알사스⋅로렌 지방을 프랑스에 돌려 주고, 자아르 지방은 15년 후 투표에 부칠 것이 결정되고, 폴란드는 독립하였다. 독일의 식민지는 영국과 일본이 차지하고, 독일로 하여금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케 하였다. 오스트리아는 오스트리아⋅체코슬로바키아⋅헝가리의 세 나라로 나뉘어지고 유고슬라비아가 새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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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 대전 후의 유럽
제1차 세계 대전 후의 유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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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연맹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자유⋅정의⋅인도의 정신과 국제 협조를 새로운 평화의 기본 원칙으로 하여, 비밀 외교의 폐지⋅군비 축소⋅민족 자결주의 등을 주장하는 4개 조항을 내걸고 평화 기구로서의 국제 연맹을 만들 것을 제의하여 1920년에 국제 연맹이 조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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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설하는 윌슨 대통령
연설하는 윌슨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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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조약 이후 전제주의 국가 대신 민족 단위의 공화국이 많이 생겨났다.

우리 나라의 3⋅1 독립 운동이 일어난 것도 민족 자결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국제 연맹은 본부를 제네바에 두고 50여 개국이 참가하여 총회⋅연맹 이사회⋅국제 재판소를 두었다. 그러나 주동국인 미국이 의회의 반대로 참가하지 못하여 기대하였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국제 연맹이 무력하여지자 다시 군비 경쟁이 일어났다. 1921년 미국⋅영국⋅프랑스⋅일본⋅이탈리아 등 5대국이 워싱턴에 모여 해군 주력함(主力艦)의 비율을 결정하였고, 다시 9개국이 모여 중국 문제 등에 대하여 의논하였다.

그 후 독일의 연맹 가입을 인정하고, 1927년에는 제네바에서, 1930년에는 다시 런던에서 해군 군축회의가 열리었다.

그러나 독일은 막대한 배상금을 치를 만한 능력이 없었고, 프랑스는 이 배상금을 기어이 받고자 하니 복잡한 문제가 생겼다. 미국은 독일과 프랑스의 중간에 나서서 배상금의 지불 기한을 연장 또는 감소시켜 주고 되도록 평화 유지에 노력했다.

《주요 용어》

베르사이유 조약, 민족 자결주의, 국제 연맹, 군비 축소 문제, 배상금 문제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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