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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고려 중기의 사회 동요와 무신 정권

〔학습 개요〕

고려는 중기에 이르러, 밖으로는 만주에서 일어난 금의 압력을 받고, 안으로는 지배층 상호간에 알력이 생겼다. 한편, 고려 귀족 사회는 문신을 우대하고 무신을 천대하는 경향이 점차 짙어져, 이로 인한 모순이 무신의 난으로 번졌다. 그 후, 정권은 무신들에 의해 좌우되었고, 이에 따라 천민 출신의 무신이 집권하는 경우도 나타났다.

무신의 난 후, 신분상의 차별을 철폐하고 자유로운 사회 활동을 바라는 민중의 움직임이 전국적으로 나타났다.

무신들의 정권 쟁탈과 민중의 저항 운동 속에서 최충헌이 고려의 실권을 잡았다. 그는 자신의 정치적 지위를 굳혀, 이후 4대에 걸친 최씨 정권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학습 문제

1. 발해 멸망 후 만주를 지배한 세력은 고려와 어떤 관계에 있었을까?

2. 여진족에 대한 고려의 북진 정책은 어떻게 추진되었을까?

3. 무신의 난은 어찌하여 일어났으며, 최씨 무신 정권은 어떻게 그 기초를 굳혔을까?

4. 무신의 난 후 어찌하여 각지에서 민중의 저항 운동이 일어났을까?

여진 관계와 금의 등장

만주의 넓은 지역과 고려 국경선 일대에 살고 있던 여진족은,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섬기며 조공을 바쳐 왔다. 그러나, 12세기 초에 이르러 여진족은 완옌부의 추장을 중심으로 크게 뭉쳐 함흥 근처에까지 세력을 뻗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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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진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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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되자, 고려에서는 별무반이라는 특수 부대를 조직하고 윤관 등에 명하여 여진을 정벌하게 하였다. 윤관은 함흥 지방의 여진을 소탕하고, 그 주위에 9성을 쌓아 대비하였다. 그러나, 이 9성은 여진족이 거듭 돌려 주기를 청해 오자, 지키기 어렵다는 이유로 여진족에게 돌려 주고 말았다.

그 후, 여진족의 추장 아구다는 거란군을 크게 격파하고 나라를 세워 금이라 하였다. 금은 송을 압박하면서 중국의 북반부를 차지하였다. 세력을 떨치게 된 금은 고려를 섬겨 오던 이 때까지의 태도를 바꾸어, 사대의 예를 갖추라고 압력을 가하였다.

이에 대하여, 고려의 문신 일파는 자기들의 정권 유지를 위해 그들과 화친함으로써, 국초 이래 추진되어 온 북진 정책이 일단 좌절된 셈이다.

이러한 사실은 고려 귀족 사회의 내분을 격화시켰고, 또 이것은 그 동안에 쌓인 사회의 여러 모순과 더불어 귀족 사회의 동요를 가져오게 하였다.

귀족 사회의 내분

문종에서 인종에 이르기까지 7대 80여 년간 왕실의 외척으로 있던 경원 이씨의 세력은 이 자겸 때에 이르러 그 절정에 달하였다. 이자겸은 그의 일족과 부하를 나라의 요직에 배치하고 권세를 누렸으나, 이에 만족하지 않고 스스로 왕이 되려는 야심을 품었다. 이를 눈치챈 인종이 그를 제거하려 하자, 그는 먼저 난을 일으켰다.

그 뒤, 이자겸과 그의 일당인 척준경과의 사이가 벌어졌다. 척준경은 이자겸을 귀양 보내고 잠시 권력을 잡았으나, 그도 얼마 안 되어 쫓겨나고 말았다.

이자겸의 난으로 궁성이 불타고 금의 압력을 받아 나라 안팎의 정세가 소란해지자, 도읍을 서경으로 옮기고 금을 쳐서 국위를 떨치자는 주장이 일어났다.

이 주장에 앞장 선 사람들은 묘청을 중심으로 한 서경파였다. 당시에는 풍수 지리설이 민심을 사로잡고 있었으며, 또 금을 미워하는 감정이 높았으므로, 묘청 등의 이러한 주장은 큰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인종도 여러 차례 서경을 내왕하고 거기에 대화궁을 세워 도읍을 옮기려는 뜻을 비쳤다. 이 천도 운동에는 묘청 등이 개경의 귀족 세력을 제거하고자 하는 야심도 있었으나, 고려의 전통적인 북진 정책이 나타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천도 운동은 김부식을 중심으로 한 개경파 귀족의 맹렬한 반대로 실패하였다. 이에 묘청은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켰는데, 결국 김부식이 거느린 정부군에게 평정되고 말았다.

문무 대립과 무신의 난

거란의 침입이 그친 후 사회가 안정되자, 고려에서는 정치 권력은 물론 토지 분배, 교육 및 군사 지휘권 등에 있어서도 문신들을 우대하였으며, 문신은 무신을 천대하여 큰 모욕을 주기도 하였다. 같은 양반이면서도 이러한 푸대접을 받는 무신들은 항상 불평을 품고 있었다. 거기에다, 당시 문신 귀족들은 농민들의 토지를 빼앗는 등 백성들의 원한을 크게 샀다.

드디어, 정중부 등의 무신이 난을 일으켜 정권을 잡고, 의종을 비롯하여 많은 문신들을 몰아 냈다(1170).

무신 정권이 성립되자, 그들 사이에 권력 다툼이 일어나 정중부는 경대승에게 살해되었다. 경대승이 병사한 뒤 이의민이 잠시 정권을 잡았으나, 최충헌 형제에게 피살당하였다.

정권을 독차지한 무신들은 문신 이상으로 부패, 횡포하여 전혀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하였다. 이러한 사회 정세 아래서 전국적으로 민중의 저항 운동이 일어났다.

민중의 저항 운동

문신 귀족들이 지배할 때에도 고난을 겪었던 농민과 천민들은 무신 지배하에서는 더 큰 압박을 받았다. 거기에다 무신 정권이 수립된 후로는 노비 출신의 무신이 큰 세력을 쥐는 현상도 나타났다.

이러한 풍조는 민중을 자극하여, 그들의 사회적 지위를 향상시키고 천민 신분을 벗어나려는 저항 운동을 불러일으켰다. 이 저항 운동은 무신 정권의 수립 직후에 시작되어 최충헌이 집권하기까지 약 30년간 계속되었다.

이 운동은 전국 각처에서 일어났는데, 특히 남부 지역이 심하였다. 공주 명학소에서는 천민들이 일어났고, 전주와 진주에서는 노비들이 저항 운동을 일으켰다. 개경에서는 최충헌의 노비인 만적이, “삼한에서 천인을 없애자.”고 외치며 노비의 신분 해방 운동을 벌이다가 실패하여 죽음을 당하였다.

천민뿐만 아니라 농민도 각처에서 저항 운동을 일으켰는데, 경상도 운문(지금의 청도)의 김사미와 초전(지금의 울산)의 효심이 일으킨 것이 가장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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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의 지위를 향상시키기 위한 이 운동은, 정부의 시책에 어느 정도 그들의 요구가 반영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였다.

최씨 무신 정권

이의민을 제거하고 정권을 잡은 최충헌은, 지위 향상을 요구하는 민중의 저항 운동과, 문신들과 결탁된 사원 세력을 진압하여 무신 독재 정치의 터전을 굳게 하였다. 이리하여, 최씨 무신 정권은 4대 60여 년 간 계속될 수 있었다.

무신 정권이 성립된 후, 종래의 정치 기구는 유명 무실해졌다. 무신 정권 초기의 최고의 권력 기구는 중방이었는데, 최충헌이 정권을 잡자 그는 교정도감이라는 최고 권력 기구를 두고 강력한 독재 정치를 폈다. 최우 때부터는 그 저택에 정방을 두고 정부의 모든 인사 행정을 맡아 보았다.

학습 정리

1. 고려가 금과 화친함으로써 북진 정책이 한때 좌절되었으나, 고려의 자주 정신은 그 후에도 꾸준히 계속되었다.

2. 묘청의 난에는 서경파가 정권을 잡으려는 음모도 있었으나, 고려의 전통적인 북진 정책의 의지가 담겨져 있었다.

3. 신분적인 차별 대우에 불만을 품은 무신들이 정권을 타도하고 정치적 세력을 쥐게 되었으나, 무신 통치하의 고려 사회는 몹시 혼란하였다.

4. 무신 정권하에서 벌어진 농민과 천민들의 저항 운동은 신분의 향상과 자유로운 사회 활동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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