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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양반 사회의 변천

〔학습 개요〕

조선 왕국을 건설한 세력은 유교를 받드는 사대부 세력이었다. 이들은 새 왕조를 세운 후 유교 중심의 왕도 정치를 이상으로 하여 국가를 조직하고 국민을 통치하니, 조선은 유교적인 양반 사회로의 자리를 굳혔다.

조선 사회는 양반을 지배층으로 하는 신분 사회였다. 조선의 지배 조직이 가다듬어지면서 양반, 중인, 상민, 천민의 구분이 굳어졌고, 신분에 따라 정치적, 사회적, 그리고 경제적인 생활이 구별되는 사회의 모습이 나타났다.

결국, 양반만이 행세할 수 있는 그릇됨이 모순으로 나타나 사화와 당쟁이 벌어지고, 사회의 분열이 생겨 혼란을 빚었다.

가족 생활은 대가족제였고, 유교 중심의 예속과 도덕 생활이 중시되었다. 이러한 가족 제도의 유산은 오늘날 우리 생활에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

학습 문제

1. 조선 시대의 사회 생활은 어떠한 특색을 지닌 것이었을까?

2. 조선 시대 사회 생활과 오늘날의 사회 생활은 어떠한 차이를 지니고 있을까?

3. 어찌해서 사화나 당쟁과 같은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을까?

유⋅불교의 교체

조선 왕국을 건설한 유교 세력은 처음부터 불교를 배척하고 성리학적 유교만을 받드는 억불 숭유 정책을 취하였다.

그리하여, 승려가 되고자 하는 자는 일정한 재물을 납입하고 허가를 얻어야 하는 도첩제를 실시하였고, 또한 사찰의 증설을 제한하였다. 그러다가, 태종 때에는 더욱 강경한 방침을 세워 전국에 242곳의 사찰만 남겼고, 사찰의 토지나 노비를 몰수하였다.

세종 때에는 36본산제가 실시되었고, 국민에게 주자가례에 의한 유교식의 의례와 풍속을 지키도록 하였다. 그 후, 성종 때에는 도첩제까지 없애 버리고 평민의 출가를 금하였다. 이러한 불교 억압 정책으로 불교는 큰 타격을 입었다.

개인적으로 불교를 신봉하여 궁중에 내불당을 세우거나 불교 서적을 한글로 번역하게 하는 등, 뒤에서 불교를 보살펴 준 국왕도 있었으나, 그것은 일시적이고 개인적인 일에 지나지 않았다.

이러한 정책으로 삼국 시대 이래 국민 생활과 밀착되어 있던 불교는, 깊은 산 속에서 일부 서민층의 신앙으로서만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이리하여, 불교 중심, 귀족 중심의 사회는 유교 중심, 양반 중심으로 변질하게 되었고, 불교 문화 활동은 쇠퇴하였다.

유교 중심의 양반 사회

양반이란 원래 문관직인 동반과 무관직인 서반을 합해 부르던 말로, 관직을 차지하고 있는 지배자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것은 조선 왕조에서 관직을 차지할 수 있는 신분을 가리키는 말로 변해 갔다. 조선 초기에는 향리나 농민들과 뚜렷하게 구분되는 양반 계급이 있었다기보다는, 양반은 양인이라는 계층 속에 포함되는 관직자에 불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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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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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들은 관료 조직을 굳혀 나가는 가운데서 지배층으로의 사회적 지위를 굳혔고, 하급 관리, 지방 행정 협력자, 기술 관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따로 중인을 이루었다. 또한, 농업이나 상업, 수공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생산 활동에 종사하며 조세의 의무를 지는, 이른바 상민이 되었다.

이리하여, 마침내 유교적 조선 사회에 양반, 중인, 상민, 천민의 네 가지 사회 신분이 굳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사회 신분은 세습적이어서,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신분의 변화를 기대할 수 없었다. 신분은 직업과 밀접하게 관계되며, 사회적 대우는 물론, 심지어는 일상 생활에까지도 그 영향이 미쳤다.

양반과 중인

양반은 농업, 공업, 상업 활동이나 기술직에는 관계하지 않으며, 독서나 하고 관직에만 종사하는 지배 계급이었다. 그들이 하는 독서란 유교적 내용을 담은 학문을 하는 것으로, 그 학문을 토대로 과거에 응시하여 관직에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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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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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가 되면 국가로부터 농토나 녹봉을 받음으로써 생활이 안정되고, 또한 여러 가지 사회적 특권을 보장받아 행세할 수 있었다.

같은 양반이라 할지라도 문반이 무반보다 그 지위가 높았고, 또한 첩의 소생은 사회적으로 천대를 받았다.

기술을 다루는 일은 국가적으로 중요하였으나, 조선 사회에서는 기술직에 종사하는 사람은 양반보다 대접을 받지 못하는 중인들이었다.

한편, 중앙이나 지방 관청의 실무 행정을 담당하는 아전이나 서리, 그리고 하급 장교인 군교들도 중인으로서, 그들의 직업은 대체로 그 자손에게 세습되었다.

상민과 천민

상민 계급은 농⋅공⋅상 등 생산 활동에 종사하며, 국가에 대해 전세, 공납, 군역의 의무를 부담하였는데, 그 대부분은 농민들이었다.

농민은 자기의 토지를 경작하거나 개인 또는 국가 소유의 땅을 빌어 농사를 지었다. 그들은 사실상 직업의 선택이나 거주 이동의 자유가 없어 대대로 농사를 짓는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상민의 일부는 수공업이나 상업에 종사하기도 하였다. 그들의 생산, 교역 활동은 정부의 엄한 통제를 받았다. 사회의 최하 계층인 천민들은 공공 기관이나 개인에 속해 인격이 전혀 무시되어 매매, 증여, 상속, 공출의 대상이 되던 공⋅사의 노비가 대부분이었다. 노비는 이들만의 호적이 있어 대대로 그 신분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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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비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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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밖에, 광대, 사당, 무당, 창기, 백정 등도 천민이었다.

가족 제도와 예절

조선 시대의 가족 제도는 가장을 중심한 대가족제였다. 유교적 가족 정신에 터전한 가장의 권한은 절대적인 것이어서, 가족을 대표하고 지휘하며, 조상에 제사지내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효의 정신이 가장 중시되어, 효의 정신에 입각한 유교적 예의와 도덕은 곧 국왕에 대한 충성의 원리이기도 하였다.

동성 간의 결혼은 금지되었고, 지아비에 대한 아내의 정절과 복종은 절대적이었다. 따라서, 효도를 다한 효자와 정절을 지킨 열녀는 나라에 충성을 바친 충신과 함께 국가적으로 표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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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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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사회적 활동은 볼 수 없었으며, 과부의 재혼마저 금지되어 있었다. 또한, 적서의 차별이 엄격하였으며, 서자는 재혼한 여성의 자녀와 같이 여러 가지 사회적 활동에 제한을 받았다.

양반은 반드시 가묘를 모시고 조상에 제사지내야 했다. 관, 혼, 상, 제의 예식은 모두 주자가례를 따르도록 되어 있었다. 이와 같은 사회 생활이 양반 중심, 남성 중심의 것이었음은 물론이나, 한편 유교적 도덕 정신과 예의 범절이 잘 지켜져 가정의 화목이 유지되어 국민들의 충효의 정신이 철저해지는 등 아름다운 점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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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지내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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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 사회의 모순

한편, 유교적 양반 사회는 여러 가지 모순을 안고 있었다.

첫째로, 유교가 이치에 맞지 않는 신분적 사회 계층 제도를 뒷받침하고 있는 점을 들 수 있다. 즉, 유교적 양반 사회는 무슨 직업에 종사하든 간에, 또는 남녀의 구별이 있다 할지라도 재능이 있으면 그 슬기를 자유로이 펼 수 있는 사회가 아니라, 신분적인 구속과 성적인 구별 때문에 자유로운 사회 활동을 할 수 없는 사회였다.

둘째로, 유교적 양반 사회는 관직에 올라야만 국가에서 경제적 혜택을 주어 생활의 보장을 받을 수 있어, 각종 사회적 특권을 누려 가며 유복한 생활을 할 수 있는 사회였다. 말단 행정이나 기술 관직을 맡은 중인조차도 생활이 어렵고 사회적으로 차별받는 사회였으며, 국민 대다수의 상민들은 의무만을 지닌 존재로서, 일에 쫓겨 구차한 생활을 면할 수 없었다.

세째로, 관직에 올라 부귀와 영화를 누릴 수 있는 사람은 일부의 양반뿐이었다. 그들은 과거를 거쳐 관직에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양반 모두가 관직을 차지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이 차지하고자 하는 관직 수는 한정된 것이고, 이를 바라는 양반은 시대가 흐를수록 그 숫자가 늘었다. 한편, 정기, 부정기로 빈번하게 실시되는 과거로 인하여 그 합격자 수가 늘어서, 과거에 합격하고도 관직에 오를 수 없는 사람이 많이 생겼다.

사림의 진출과 농장

이상과 같은 양반 사회의 모순으로 말미암아, 정권과 관직을 둘러싸고 대립과 투쟁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대립은 성종 때에 지방에서 학문에 힘쓰던 사림 출신의 학자들이 중앙으로 진출하여 관직을 차지하면서 복잡하게 얽히게 되었다.

길재의 영향을 받아 지방에 파묻혀 학문을 연구하며 후학을 지도해 오던 사림 출신들이, 학문을 좋아하던 성종의 부름으로 정계에 나와 홍문관, 사간원, 사헌부의 관직을 차지하게 되자, 의정부, 6조의 정무를 담당하던 구세력과 대립하게 되었다.

구세력은 조선 초기부터 나라에 공을 세워 공신전, 별사전 들을 받아 넓은 농토를 지배하던 훈구파였다. 이들은 개간이나 매입, 또는 권세를 이용하거나, 세금을 피하려는 농민의 자진 기탁 등의 방법으로 넓은 농토를 지배하고 있었다. 이들의 농토를 농장이라 한다. 이리하여, 그들은 다수의 농지와 노비를 거느리고 부귀 영화를 누렸다. 이러한 현상은 15세기 중엽부터 시작되었으나, 점점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큰 문제가 되었다.

새로이 정계에 진출한 신세력인 사림 출신 관료들은 이에 불만을 가지고 경제력을 차지하기 위해 노력했으므로, 신⋅구의 관료 사이에 투쟁은 피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사화와 당쟁

성종 때부터 차차 대립하게 된 신⋅구 관료 세력은 연산군 때에 이르러 마침내 사화의 참극을 벌이다가, 두 차례에 걸친 사화로 주로 신진 관료들이 화를 입었다.

중종 반정 이후 한때 조광조 등 사림파가 유교적 개혁 정치를 추진한 일도 있었으나, 결국은 구세력의 반격으로 내쫓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후, 명종 때에도 한 차례 사화가 벌어졌다.

네 차례의 사화를 겪으면서도 관료 간의 대립은 그치지 않았다. 선조 이후에는 다시 정계에 등장한 사림 간에 정권을 다투게 되었는데, 이 지배층의 대립 투쟁을 흔히 당쟁이라 한다.

이후 당쟁이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각 당파의 인물들이 지방에 뿌리박고 있는 서원을 중심한 지방 세력을 배경으로 하였고, 농장이라는 경제적 기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배층의 당쟁으로 그 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화를 입고 정국이 자주 변하자, 나라의 질서도 흐트러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와 같이 되풀이된 당쟁은 그 당시의 정치 제도와 사회 모순, 그리고 경제 생활에서 생겨난 것으로, 정책 결정에 어느 정도 탄력성을 부여하였으며, 지방을 중심으로 학문을 깊이 연구하는 분위기가 마련되기도 하였다.

학습 정리

1. 조선 사회는 유교적 정신에 터전한 양반 사회였고, 유교적 예속과 도덕 생활을 지켜야 하는 신분 사회였다.

2. 양반은 고려의 귀족과 달리 과거를 거쳐 관료가 되는 지배층인데, 모든 양반들이 소수의 벼슬만을 위해 노력하므로 자연히 대립과 투쟁이 생겨나지 않을 수 없었다.

3. 양반 사회의 진전에 따라, 관직에만 관심을 보이는 세력과, 이와는 달리 지방에서 유학을 연구하며 서원을 중심으로 학문에 힘쓰는 사림 세력이 자라났다.

4. 유교적 양반 사회 국민의 대다수는 농민이었다. 그들은 경작권이 보장되고 사유지를 가질 수도 있어 고려 시대의 농민보다 그 지위가 향상되었으나, 신분상의 여러 가지 제약에서는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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