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대 국사 교과서
  • 3차 교육과정
  • 중학교 국사 3차
  • Ⅵ. 조선 사회의 새 움직임
  • 2. 중흥 정치와 경제 활동의 성장

2. 중흥 정치와 경제 활동의 성장

〔학습 개요〕

사회의 혼란과 경제 사정의 악화를 바로잡기 위한 중흥 정치의 노력이 영⋅정조 때에 전개되었다.

영⋅정조의 중흥 정치로 정치 질서가 회복되고, 산업 활동이 되살아났으며, 경제 활동이 활발해졌다. 농업 기술의 발달, 수리 시설의 건설, 특용 농산물의 재배로 생산이 증가되어 농민의 지위가 상승되었고, 농촌에는 여러 가지 협동 조직이 생겨났다. 한편, 자유로운 수공업 활동이 자라나고, 상인의 성장과 공인의 활동으로 교역이 활발해졌다. 따라서, 이러한 경제 활동을 뒷받침하기 위한 경제 조직도 생겨났다.

원래 여진족과 일본에 대하여 극히 제한된 교역의 기회를 주어 오던 무역 활동도 활발해져서, 개성을 비롯한 각지의 상인들이 이에 종사하여 많은 부를 이루게 되었다.

이와 같은 사회의 안정과 경제의 성장이 바탕이 되어 차차 인구가 늘고, 각지에 도시가 성장하게 되었다.

학습 문제

1. 조선 왕조의 부흥과 민생의 안정을 위한 정치적 노력은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2. 농업 생산의 증가와 농민 생활의 안정을 위해 어떠한 대책이 마련되었을까?

3. 조선 전기에 비해 후기의 경제 활동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영⋅정조의 중흥 정치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초까지인 현종, 경종 때에는 당파 싸움이 심하였으나, 그 뒤를 이은 영조와 정조의 76년 동안은 정치적으로 자리가 잡혔고 산업 활동이 성장하여, 문화가 크게 발전하였다.

영조는 당쟁을 피하고자 탕평책을 썼으며, 국가 재정을 튼튼히 하고 민생의 어려움을 덜려고 균역법을 실시하였다. 한편, 학문을 장려하여 많은 책을 펴냈고, 백성들의 생활을 돕기 위하여 농업을 장려하였으며, 세금 제도를 고쳐 농민의 부담을 덜어 주었다. 형벌 제도를 고쳐 악형을 금지하고, 양반이 함부로 노비에게 형벌을 가하지 못하게 하였다. 한편, 사치를 금하고 풍속 생활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농업과 상업을 장려하는 등 사회⋅경제면에서도 큰 업적을 남겼다.

확대보기
탕평비
탕평비
팝업창 닫기

영조의 뒤를 이은 정조는 영조의 뜻을 따라 당쟁을 억누르고, 국가 발전에 힘을 기울였다. 그는 많은 문화적 업적을 남겼다. 특히, 규장각을 설치하여 학문 연구와 도서 출판에 힘썼으며, 활자를 개량하여 인쇄술을 더욱 발전시켰다. 또한, 산업 발달에도 힘을 기울였다.

확대보기
규장각의 장서
규장각의 장서
팝업창 닫기

실학 운동은 정조 때에 가장 활발했는데, 천주교 신앙 운동이 일어나게 된 것도 이 때였다.

농촌 경제의 성장

대동법, 균역법의 실시와 아울러 정부에서는 농업의 발달을 위해 여러 가지로 권농책을 썼다. 수리 시설을 늘리고, 황무지를 개간하여 농토를 넓히는 한편, 산림 보호에 힘썼다. 또한, 농민들도 전란 후의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여러 가지로 노력하였다.

한 농토에서 쌀과 보리를 번갈아 수확할 수 있는 2모작이나, 묘포에서 모를 길러 모내기하는 이앙법, 그리고 농사에 비료를 이용하는 등 농업 기술의 향상을 보아, 농업 생산은 크게 늘어 농촌의 부흥 발전을 도왔다.

인삼, 담배 등 특용 작물을 재배하기 시작한 것도 이 때부터의 일이다. 원래 인삼은 자연 삼(산삼)을 이용하였으나, 조공과 약재로 그 수요량이 느는 반면, 자연 삼은 오히려 줄어들어 삼을 마련하는 일은 큰 문제가 되었다. 이에, 영조 때에 산삼을 재배하는 기술을 알게 되어, 인삼 재배가 차차 보급되어, 많은 이득을 가져다 주게 되었다.

또, 구황 식물인 고구마, 감자가 일본과 청에서 전해져 각지에서 재배되었으며, 농민들은 담배, 인삼 등 특용 작물이나 무명, 삼베, 비단 등 가내 수공업품을 장에 내다 팔아 필요한 물건을 사들이는 생활을 익히게 되었다.

확대보기
종저보
종저보
팝업창 닫기

농업 생산이 증가함에 따라 농민들 가운데는 많은 농지를 경작하여 부를 이루는 경우가 나타났다.

농촌 사회의 협동 조직

조선 후기 농촌 사회에는 서로 도우며 살아가기 위한 자조 조직이 발달하였다. 향약, 두레, 계가 바로 이러한 조직이었다.

향약은 본래 중국에서 기원한 것으로, 우리 나라에서는 중종 때 시험된 바 있었고, 그 후 이황, 이이 등이 만든 향약을 본떠 농촌 사회에 널리 퍼지기에 이르렀다. 선한 일을 서로 권하며 서로 돕고 어진 풍속을 키워 나가자는 내용의 향약은, 지방 양반들이 중심이 되어 유지된 것이었다. 따라서, 향약은 농민들의 이익을 보살피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유교적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겠다.

향약의 4대 절목

1. 덕업을 서로 권함〔德業相勸〕.

2. 과실을 서로 경계함〔過失相規〕.

3. 예속으로 서로 사귐〔禮俗相交〕.

4. 환난을 서로 도와 줌〔患難相恤〕.

농민 중심의 자조 조직 중 가장 소박한 것은 두레였다. 주로 경기 이남의 농촌에서 볼 수 있던 두레는 협동, 노동, 상호 부조, 공동 오락 등을 내용으로 하는 촌락 단위의 조직으로, 두레마다 깃발을 가졌다. 농사철에는 상호 협조하여 농사에 힘썼고, 같이 농악을 즐기기도 하였으며, 이웃 부락의 두레와 여러 가지 경기도 가졌다.

확대보기
두레와 농악
두레와 농악
팝업창 닫기

계는 농민들만의 것은 아니었고, 친목을 목적으로 한 것, 상조를 목적으로 한 것, 동업자끼리의 이득을 취하기 위한 것 등 여러 가지 종류가 있었다.

수공업 활동의 성장

사회의 안정과 상업의 발전, 공인에 의한 국가 필요 물자의 조달을 배경삼아 수공업 활동도 활발해졌다. 관에 속해 국가의 엄한 통제를 받아 오던 관영 수공업보다, 도시에서 자유로이 생산 활동을 하는 민영 수공업이 점점 고개를 들게 되었다. 그리하여, 도시의 수공업자들은 때로는 공인 자본의 뒷받침으로 주문 생산까지 할 정도로 활발하게 수공업 생산 활동을 하였다. 이리하여, 유기, 자기, 종이, 모시, 죽세공품 등의 생산이 크게 늘었다.

확대보기
대장간
대장간
팝업창 닫기

상업 활동의 성장

조선 전기의 상업 활동은 국가의 통제하에, 서울에서는 시전 상인이 정부의 도움을 받아 가며 일정한 물건을 취급하였고, 지방에서는 보부상들이 다소의 생활 물자를 행상하는 데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시전 상인들은 국가에 일정한 의무를 부담하는 댓가로 일정한 지역이나 일정한 물품에 대한 전매의 권리를 인정받았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는 점차 활발해진 상업 활동과 사회의 안정을 배경으로 상인들은 자유로이 활동하였다. 자유 상인들은 시전 상인의 방해를 받으면서도 꾸준히 자라 시전 상인과 경쟁하였고, 서울과 그 밖의 도시에는 상설 시장까지 생겨났다.

확대보기
칠패 시장도
칠패 시장도
팝업창 닫기

나라에서 시전 상인들에게 동일 상품을 취급하는 자유 상인들을 억제, 단속하는 권한인 금난전권을 보장해 주었는데, 이 금난전권은 소비자와 생산업자들 모두에게 해를 입히는 것이었으므로 말썽이 자주 일어났다.

그리하여, 정조 때에는 육의전을 제외한 모든 시전 상인들의 금난전권이 철폐되고, 이에 힘입은 자유 상인들이 보다 자유로운 상업 활동을 활발하게 펴게 되었다.

한편, 15세기경부터 자연 발생적으로 생겨나기 시작한 지방의 장시도, 후기에 들면서부터는 농촌 각지에 생겨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18세기 중엽에는 정기적으로 장이 열리는 장시가 전국에서 천여 개나 헤아릴 수 있게 되었다.

지방의 장시는 교역의 장소이면서 농촌 사회의 사교장이나 오락장 구실도 했고, 소식을 교환하는 마당이기도 했다. 특히, 보부상은 지방의 장시를 돌아다니면서 활발한 활동을 폈다.

한편, 대동법의 실시로 공납이 미곡으로 바뀌자, 국가에서 필요한 공납 물자를 공급하는 일을 맡아 보는 계층인 공인이 생겼다. 공인들은 전국 각지에서 정부가 필요로 하는 물자를 사들여 관에 납부하고 나라에서 댓가를 받는, 정부가 보장하는 상인이었다. 이들은 여러 가지 유리한 조건하에서 활동하여 많은 이득을 보았는데, 조선 후기 상업계는 이들의 활동으로 활기를 띠었다.

국제 무역의 전개

조선은 원래 외국과의 무역 활동을 정식으로 펴지는 않았다. 다만, 외교 사신들이 왕래할 때에 국가가 필요로 하는 물자를 조달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17세기 이후 청, 일본과의 외교 활동이 빈번해지면서, 중국과의 공적인 무역 활동인 개시 무역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사신이 왕래하는 기회에 상인들에 의해 후시 무역이라는 사무역 활동도 자라나게 되었다. 그 후, 일본과도 왜관 개시를 통한 무역 활동이 생겨났다.

중국과의 무역에는 개성, 평양, 의주의 상인들이 종사하고, 일본과의 무역에는 동래 상인들이 주로 종사하였다. 국제 무역은 송상이라고 불린 개성 상인들이 주름잡았는데, 그들은 각 지방에 송방이라는 조직을 두고 국내 시장과 무역 활동에 종사하였다.

확대보기
조선 후기 무역지와 상업 활동
조선 후기 무역지와 상업 활동
팝업창 닫기

경제 조직과 화폐의 유통

상업 활동이 활발해지고 수공업 생산품의 생산이 늚에 따라, 경제 활동을 보다 편리하게 처리하기 위한 여러 가지 경제 조직이 생겨났다.

도시의 시장에는 거간, 감고, 전당업자 등이 생겨나 상품 거래에 편리를 주었고, 객주나 여각과 같은 숙박 시설과 상품 위탁 판매 조직도 생겨났다. 또한, 상인들의 상업 규모가 전국적으로 확대되자 어음 제도도 생겨났고, 개성 상인들은 송도 사개 부기라는 독특한 상품 거래 치부책까지 만들어 썼다.

이와 같이 산업 활동이 활발해지고 교역 활동이 발전하게 되자, 불편한 물물 교환이나 쌀과 포목으로는 교환의 매개체를 삼을 수가 없게 되었다. 특히, 18세기에 들어와서 대동미와 그 밖의 세금이 거의 금납화되어 가고, 지주들에게 바치는 소작료도 화폐로 요구되면서 유통 수단의 변화를 촉진시켰다. 그리하여, 숙종 때 주전도감이 설치되어 상평통보라는 금속 화폐가 만들어지고, 17세기 말에는 화폐 사용이 전국적으로 널리 보급되었다.

확대보기
상평통보
상평통보
팝업창 닫기

인구 증가와 도시의 성장

점차 사회가 안정되고 산업 활동이 활발해지고 상업이 성장함에 따라, 농촌 인구가 증가되는 한편, 일부 농촌 인구가 도시로 흘러들었다. 따라서, 전국의 인구와 도시 인구는 다 같이 뚜렷한 증가를 보였으며, 지방 도시들도 성장하였다.

당시의 인구 조사는 오늘날과 같이 철저히 하지 않았으므로 정확한 숫자를 파악하기는 힘드나, 기록에 의하면 이 무렵 전국의 호구 수는 대체로 다음 표와 같다.

조선 후기의 전국 호구 수
연도 홋수(호) 인구(인)
1675(숙종 원년) 1,250,298 4,725,704
1699(숙종 25년) 1,333,330 5,774,739
1726(영조 2년) 1,614,598 7,035,400
1750(영조 26년) 1,679,460 6,761,226
1777(정조 원년) 1,715,371 7,238,552
1801(순조 원년) 1,757,973 7,513,792

학습 정리

1. 양 난의 전후 복구에 힘입어, 국민 생활의 안정을 목적하는 민본 정치의 노력이 조선 왕조의 부흥을 가져왔다.

2. 농본, 중농 정책의 적극적 추진으로 농업 생산이 증가되고, 농촌 사회의 협동 조직으로 민생은 점차 안정을 보았다.

3. 공인과 상인의 활동, 국제 무역의 발달 및 수공업 생산의 증가로 화폐 경제가 발달하였다.

4. 정치의 안정, 활발한 사회 생활, 그리고 자라나는 경제 활동이 바탕이 되어 도시가 성장하게 되고 인구도 늘었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