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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Ⅶ. 근대화의 시련과 자주 운동
  • 1. 흥선 대원군의 정치와 개화⋅척사 운동

1. 흥선 대원군의 정치와 개화⋅척사 운동

〔학습 개요〕

세도 정치의 혼란과 다가오는 침략 세력으로 말미암아 나라 안팎이 어려움을 맞게 되었다. 이 때, 흥선 대원군이 등장하여 과감한 개혁 정치와 쇄국 정책을 폈으나, 정권한 지 10년 만에 그는 물러나고 우리 나라도 개항을 하게 되었다. 당시 우리 선각자들은 개항의 필요를 깨닫고 있었다. 이들은 개항 후 개화 사상을 더욱 굳혀 근대 국가 건설 운동을 폈다.

한편, 외세의 위협을 맞아 위정 척사를 부르짖는 세력이 대두됨에 따라, 국론이 개화와 척사로 엇갈려 정계에는 혼란이 일어났다. 그리고, 침략적 야심을 품은 일본과 청의 대립으로 이러한 혼란은 더욱 격화되었다.

이처럼 안팎의 대립이 격화된 속에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이 벌어졌다.

학습 문제

1. 흥선 대원군의 개혁 정치와 쇄국 정책은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2. 쇄국에서 개항으로의 정치⋅외교적 변화는 어떻게 진행되었을까?

3. 척사와 개화 사상은 어찌하여 대립하게 되었을까?

4. 갑신정변은 어떠한 사건이며, 왜 실패하였을까?

흥선 대원군의 개혁 정치

안으로 정치적 혼란, 밖으로 서양 세력의 접근으로 큰 불안을 맞은 때에 정치적 실권을 잡은 이가 흥선 대원군이었다. 그는 왕권을 확립하고 정치를 바로잡아 나라를 다시 일으켜 보려고 과감한 개혁 정치를 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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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 대원군
흥선 대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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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세도 정치의 모순을 제거하고자 당파와 문벌을 가리지 않고 인재를 등용하였고, 국가 재정을 해결하기 위하여 양반들에게도 호포를 부담시켰으며, 또 폐단 많던 서원을 유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폭 정리하였다. 법전을 새로이 정비하는 한편, 의복 제도를 간편하게 고치고 사치를 금하였다.

나아가, 왕실의 위엄을 다시 세우고자, 임진왜란 때 불타 버린 경복궁의 중건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 비용을 채우기 위하여 원납전을 징수하고 당백전을 발행하며 민중을 노동에 동원하였으므로, 백성들의 원망을 사기도 하였다.

두 차례의 양요

철종 때에 이르러서는 이양선이 우리 해역에 자주 출몰하였고, 때로는 통상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이 때 조정에서는, 청이 서양 세력을 받아들임으로써 괴로움을 겪고 있음을 전해 듣고 그들의 요구를 거부하였다. 한편 이 무렵, 연해주를 차지한 러시아도 두만강을 건너와 통상을 요구하였다.

흥선 대원군은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고자 쇄국 정치를 고집하였다. 그리고, 국내에서 포교하던 프랑스 선교사와 많은 천주교도들을 박해하였다.

이를 문제삼아 프랑스는 군함을 보내어 강화도에 침입하였다(1866). 그로 인하여 한강 수로가 막혀 서울은 한때 어려움을 겪었으나, 대원군의 정책에는 변함이 없었다. 프랑스 군은 정족 산성을 공격하다가 양헌수 부대에 패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고 1개월 만에 물러갔다(병인양요). 이는 우리 나라 안에서 서양 열강과 가진 최초의 전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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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요도
양요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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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다 앞서 같은 해에 미국 상선 제너럴 셔어먼 호가 대동강에 들어와 소란을 피우다가 평양 군민들에 의하여 불태워진 일이 있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미국은 함대를 출동시켜 강화 해협을 침범하여 왔다(1871). 다시금 서양 세력을 맞게 된 우리 군대는 광성진에서 맹렬한 전투를 펴 마침내 이를 물리쳤다(신미양요).

쇄국의 강화와 대원군의 하야

두 차례의 양요를 물리치는 데 성공한 대원군은 더욱 거세게 천주교를 탄압하고, 쇄국을 강화하였다. 그는 서울을 비롯하여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세워 국민들의 쇄국 정신을 드높였다. 그러나, 왕권 확립과 제도의 개혁 등으로 공을 세운 그였지만, 마침내 사림 세력을 앞세운 민씨 일파의 반대 세력에 밀려 10년 만에 정권을 내놓고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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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화비
척화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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쇄국에서 개항으로

쇄국 정치를 펴 오던 대원군이 반대 세력에 의해 물러나고 민씨 세력이 들어서자, 대외 정책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19세기 중엽, 미국의 군함 외교에 밀려 개항한 일본이 재빨리 서양 문명을 받아들여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근대 국가로 발전하자, 외부로 눈을 돌려 우리 나라에의 접근을 꾀하였다. 이 때, 흥선 대원군은 외교 문서의 형식 등이 이전과 다르다 하여 이를 거절하여, 우리 나라와 외교 관계를 맺는 데 실패하였다.

그 후, 대원군이 하야하자, 운요오 호 사건을 유발하고 다시 통상을 강요하였다. 이미 이 때에는 우리 나라에서도, 세계 정세의 변동에 따라 쇄국 정책을 버리고 각국과 통상해야 한다는 의견이 일어나 드디어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맺고 나라의 문호를 열게 되니(1876), 부산, 원산, 인천의 세 항구가 차례로 개항되었다.

그러나, 근대 지식에 어두웠던 우리는 외교적으로 불평등한 조약을 맺었고, 일본 정부에서는 서울에 공사관을 설치하면서 그 세력을 차차 우리 나라에 침투시키고자 여러 방면으로 침략의 손길을 뻗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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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조약 조인 광경
강화도 조약 조인 광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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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일본 세력의 침투에 불안을 느낀 청은 이를 견제하기 위하여 서양 여러 나라와의 수호 통상을 우리 나라에 주선하여 왔다. 그리하여, 먼저 미국과 국교를 맺었고(1882), 뒤이어 영국, 독일, 러시아, 프랑스 등 여러 나라와 조약을 맺고 국교를 가지면서 우리 나라도 처음으로 세계 무대에 등장하게 되었다.

개화의 움직임

굳게 닫혔던 쇄국의 문을 열고 세계 문화와 접촉하게 된 우리 나라는, 발달된 근대 문명을 받아들이기 위한 개화에 더욱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강화도 조약 성립 직후 김기수를 수신사로 일본에 파견하였고, 이어서 또 김홍집을 파견함으로써 일본의 발전과 세계의 새로운 동향을 알게 되어 개화 운동이 본격화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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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수 제1차 수신사 행렬
김기수 제1차 수신사 행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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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박정양, 어윤중, 홍영식 등을 중심으로 하는 신사 유람단을 조직하여 일본의 문물 제도를 시찰하게 하였다. 그리고, 김윤식을 영선사로 삼아 학생들을 이끌고 청에 가서 근대 군사 기술을 배워 오게 하였다. 이와 같이, 나라에서는 시찰단과 유학생을 외국에 파견하여 발달된 문물 제도를 배워 오게 하고, 이를 본받아 우리의 새로운 제도를 마련하기에 힘썼다.

통리기무아문을 두어 개화 정치를 맡아 보게 하고, 그 밑에 12사를 두어 국정을 분담하게 하며, 별기군이라는 신식 군대를 조직하여 양반의 자제로 하여금 신식 군사 훈련을 받게 한 것 등은 모두 개화를 위한 노력이었다.

개화와 척사

이러한 개화 운동에 대하여 과거의 전통을 고수하려는 보수파의 반대 운동이 전국의 유생 세력을 중심으로 활발히 전개되었다. 이미 개항 전에 이항로나 기정진 등이 개항을 반대하는 위정 척사론을 주장한 바 있었으나, 개항 후 정부에 의해 개화 운동이 전개되자, 유림 세력은 반대의 상소 운동을 전국적으로 폈다. 그들은 민족 주체 의식을 가지고 운동을 폈으므로 국민들에게서 큰 호응을 받기도 하였다. 이 운동을 추진한 대표적 인물은 최익현, 이만손, 홍재학 등이었다.

개항 이후 근대 문물과의 접촉이 활발해지면서, 새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우리도 하루바삐 근대 국가를 이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선각자들이 나타났다. 그 중심 인물은 김옥균, 박영효 등 급진 개화파인 젊은 정치가들로서, 이들은 흔히 개화당이라고 불린다.

한편, 같은 개화론자이면서도 서양 문물을 서서히 받아들이자는 온건 개화파가 있었는데, 민영익, 김윤식, 어윤중, 김홍집 등이 이에 속한다. 이처럼, 위정 척사, 급진 개화, 온건 개화 등의 사상이 나타나 의견의 대립이 심해지는 가운데 임오군란, 갑신정변이 일어났으며, 청⋅일의 세력이 또한 여기에 끼여 서로 다투게 되었다.

임오군란과 청⋅일 관계

흥선 대원군이 물러난 후 개항과 더불어 개화 운동이 활발해지고, 이를 배경으로 일본 세력이 점차 우리 나라로 뻗어 오게 되자, 위정 척사 세력은 민씨 정권에 반발하고 일본 세력에 저항하기 위한 운동을 폈다.

임오군란은 개화와 척사의 대립, 민씨 세력과 대원군 세력의 갈등, 그리고 청과 일본 세력이 얽힌 가운데, 임오년 6월에 일본의 군제를 본받아 신설한 별기군 부대와의 차별 대우는 물론, 박봉의 급료를 13개월이나 받지 못하여 가족들과 함께 곤란을 겪어 오던 구식 군대의 불평이 마침내 폭발하여 일어났다(1882). 그들은 민씨 일파와 고관들을 죽이고 포도청을 부수며 일본 공사관을 습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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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기군 훈련
별기군 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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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변란을 수습하기 위하여 흥선 대원군이 다시금 정권을 잡게 되었다. 집권한 대원군은 민씨 일파를 내쫓고, 앞서 개편된 군제를 옛 제도로 복구하였으며, 별기군을 해산하고 통리기무아문을 철폐하였다.

우리 나라의 정계가 이처럼 혼란해지자, 청은 일본 세력을 내몰고 그 대신 그들의 세력을 펴기 위해 군대를 출동시켜 민씨로 하여금 다시 정권을 잡도록 하였다. 이에 대하여, 청나라 못지않게 일본도 군사적 위협을 가하고 제물포 조약을 맺어 군란의 뒤처리를 하고자 하였다. 이 조약에 따라 박영효 일행이 일본에 사절로 가게 되었다. 이 때, 그들은 한국이 독립 국가임을 나타내고자 처음으로 태극기를 사용하였다. 이 군란을 계기로 청은 외교 고문 등을 파견하면서 심한 간섭을 하였다.

갑신 정변과 청⋅일의 대립

청의 지나친 내정 간접과 또한 이에 호응하는 민씨 세력에 대항하여 자주 개화를 외치고 나선 것은 급진적인 개화당이었다.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등이 중심이 된 개화당은, 근대화를 빨리 이룩하여 열강과 대등한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비상 수단을 쓸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였다. 마침내 우정국 개설을 이용하여 반대 세력을 몰아 내고 정권을 잡은 후 새로운 내각을 조직, 14조에 달하는 정강을 발표하였다(1884). 그러나, 정변은 3일 만에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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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균
김옥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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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가게 된 데는, 급진 개화파와 온건 개화파의 대립과 청 의 간섭 등 여러 이유를 들 수 있으나, 근본적으로는 근대 국가 건설에 대한 국민적 깨달음이 없이 소수의 선각자들만 성급하게 활동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일본의 후원을 과신한데다가, 청의 개입이 강했던 데도 원인이 있었다.

이와 같이 하여 정변은 실패로 끝났으나, 국제 간의 복잡한 문제는 더욱 엉클어졌다. 그리하여, 한⋅일 간에 공사관 건축비의 배상 등을 내용으로 하는 한성 조약이 체결되었고, 청⋅일 간에는 톈진 조약이 체결되었다.

톈진 조약으로 청⋅일 양국 군대는 우리 나라에서 물러나게 되었고, 앞으로 두 나라가 우리 나라에 부득이 군대를 파견할 필요가 생길 때에는 서로 사전에 통고할 것을 약속하였다.

학습 정리

1. 흥선 대원군은 왕권의 재확립을 기하고자 과감한 혁신 정치를 펴는 한편, 쇄국 정책을 강화하였다.

2. 세계 대세에 비추어 선각자들이 개항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는데, 마침내 운요오호 사건을 계기로 하여 우리 나라는 개항하게 되었다.

3. 개항 후 열강의 침투 속에서도, 선진 문명을 받아들여 부강한 국가를 이룩해야겠다는 개화 사상이 자라나고 있었다.

4. 위정 척사 운동은 세계사의 흐름에 거스르는 성격을 띠고 있었으나, 열강의 침략에서 나라를 지켜야겠다는 민족 운동의 하나이기도 하였다.

5. 안으로 개화와 척사의 대립, 밖으로 청⋅일의 대립은 마침내 임오군란, 갑신정변을 초래하였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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