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대 국사 교과서
  • 4차 교육과정
  • 중학교 국사 4차(상)
  • Ⅳ. 고려 시대의 생활
  • 1. 고려의 성립

1. 고려의 성립

〔학습 개요〕

후삼국의 분열을 통일한 고려 태조 왕건은, 통일 후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하여 호족 세력을 통합하고, 발해 유민을 흡수하였으며, 나아가서는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려는 북진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 북진 정책은 그 후에도 변함 없이 고려의 기본 정책이 되었다.

고려 초기에는 호족 세력에 의해 왕권이 위협당하기도 했으나, 광종은 왕권 안정을 위한 강력한 정책을 폈고, 이어 성종은 안정된 왕권을 바탕으로 하여 정치, 경제, 교육 등 여러 제도를 정비하기 시작하였다.

학습 문제

1. 왕건은 후삼국의 혼란을 어떻게 수습하였을까?

2. 고려는 민족의 재통일을 위하여 어떠한 정책을 썼을까?

3. 고려의 정치, 경제, 군사, 교육 등의 제도는 어떠했을까?

4. 고려 귀족 사회의 특징은 무엇일까?

후삼국

통일 신라 말기의 호족이나 지방 세력들 중에는 넓은 지역을 지배하여 중앙 정부에 대항할 만한 힘을 기른 자가 나타났는데, 그 대표적 인물이 견훤과 궁예였다.

견훤은 신라의 남서 해안을 지키던 장군으로, 많은 무리를 모아 후백제를 세우고(900), 서울을 완산주(전주)에 정하였다. 그는, 대체로 옛날의 백제 땅에 해당되는 지금의 전라도와 충청도 일대의 지역을 차지했다.

궁예는 송악을 중심으로 나라를 세우고 후고구려라 하였다(901). 후고구려는 뒤에 국호를 태봉으로 고치고, 서울을 철원으로 옮겼다. 태봉의 판도는 지금의 강원도, 경기도, 황해도의 대부분과 평안도, 충청도의 일부로서, 대체로 옛 고구려 땅의 남부에 해당된다.

이와 같이 후백제와 후고구려가 신라와 맞서게 되어, 우리 나라는 후삼국의 혼란한 시대로 접어들었다.

고려의 건국

후삼국 중에서 가장 세력이 큰 태봉의 궁예는 새로운 사회를 이끌어 갈 능력이 없어 부하들에게 쫓겨났다. 궁예를 쫓아 내고 왕건이 왕위에 올랐는데(918), 이가 곧 고려 태조이다.

태조는 본래 송악의 호족으로, 궁예의 부하로 있으면서 싸움 때마다 공을 세워 실력을 길렀고, 많은 호족과 승려, 학자들과 손을 잡아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으려고 하였다. 태조 왕건은 국호를 고려, 연호를 천수라 하고, 이듬해에는 서울을 철원에서 고향인 송악(개성)으로 옮겼다.

확대보기
고려 초의 형세
고려 초의 형세
팝업창 닫기

고려와 후백제는 서로 세력을 다투었는데, 고려가 점차 유리한 위치에 서게 되었다. 이 때에 국력이 쇠약해져 후백제의 공격에 시달리던 신라는 마침내 나라를 고려에 넘기고 말았다(935).

이 무렵, 후백제에서는 큰 내분이 일어났는데, 태조는 이 틈을 타서 후백제를 멸망시켰다(936). 그리하여, 약 반 세기 동안 분열되었던 우리 나라는 고려에 의해 다시 통일되었다.

태조의 정책

태조는 후삼국을 통일한 후 안으로는 나라의 기반을 튼튼히 하는 정책을 세웠으며, 밖으로는 북진 정책을 건국의 이념으로 삼았다.

고려는 국호에서 보이듯이 고구려 계승 정신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기 위한 북진 정책을 내세웠다. 태조는 평양을 서경이라 하여 이를 북방 개척의 기지로 삼아, 적극적인 북방 진출을 꾀하였다. 그 결과, 태조 말년에는 청천강 하류에서 영흥 지방에 이르는 넓은 영역을 수복하였다.

이 북진 정책은 뒷날 북방 민족과의 사이에 충돌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고려가 그 뒤에도 계속 추진한 기본 정책이 되었다.

태조는 또 민족 융합 정책을 취했다. 당시, 각 지방에서 커다란 세력을 가지고 있던 호족을 혼인과 기인 제도, 사심관 제도 등으로 포섭, 견제하고, 고구려 계통의 발해 유민을 받아들였다. 또, 유능한 인재라면 신라인이나 후백제인에게도 벼슬을 주었다.

특히, 태조는 불교를 중히 여겨 많은 절을 세워 국가와 왕실의 번영을 빌도록 하였는데, 부처의 은덕을 빌어 국가의 안전과 발전을 바라는 이 호국 불교 사상은 이후 고려 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

확대보기
만월대
만월대
팝업창 닫기

왕권의 안정

태조의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러 호족이나 개국 공신들의 세력은 여전하였다. 더우기, 정략적인 혼인 정책의 결과로 외척 세력이 등장하게 되어, 고려 초의 정세는 불안정하였다.

혜종 때에는 외척 왕규가 호족 세력을 기반으로 하여 왕을 암살하려는 음모를 꾸미다가 실패한 일이 있었다. 이 왕규의 난은 곧 진압되었으나, 이런 일은 외척 세력의 등장으로 빚어진 결과였다.

이에, 광종은 왕권을 확립하기 위하여 호족 세력을 억눌렀다. 먼저, 노비 안검법을 실시하여, 호족들이 불법으로 소유하고 있는 많은 노비를 해방시켰다. 또, 과거제를 실시하여 호족들의 특권을 제한하는 한편, 과거를 통해 새로운 관리를 뽑았다. 이러한 정책을 편 결과, 호족들의 세력은 약해지고 왕권은 크게 강화되었다.

광종에 이어 나라의 기초를 닦은 이는 성종이었다. 성종은 최승로의 도움을 받아 나라의 제도를 정비하고, 유교 정치 사상에 입각하여 강력한 왕권을 확립하였다. 12목에 지방관을 파견한 것은 왕권 강화 정책의 대표적인 조치였다.

정치⋅군사 조직

건국 초에 신라와 태봉의 제도를 사용하던 고려는, 성종 때 문물 제도를 많이 정비하였고, 문종 때에 가서는 거의 완성을 보았다.

성종 때에는 내사 문하성(뒤에 중서 문하성이라 함.), 상서성, 중추원 등의 중앙 정치 기구를 두었다. 중서 문하성은 국가의 정책을 작성, 심의하는 일을 맡아 보았고, 상서성은 그 아래에 이, 병, 호, 형, 예, 공의 6부를 두고 각기 행정을 맡아 보았다. 중추원은 왕명의 전달, 군사 기밀 등의 임무를 맡아 보았다.

또, 도병마사라는 기관이 있었는데, 이것은 중서 문하성과 중추원의 고관들이 모여 군사 관계의 중요 정책을 의논하는 기관이었다.

그 밖에 중요한 기구로서 화폐와 곡식의 출납 및 회계를 맡아 보는 삼사와 감찰 기관인 어사대가 있었다.

지방은 처음에 호족들의 자치에 맡겼으나, 성종 때에 12목이 설치되고 지방관이 파견되면서부터 차차 정비되기 시작하여, 그 후 전국이 5도 양 계로 나누어졌다.

확대보기
5도 양 계
5도 양 계
팝업창 닫기

각 도에는 안찰사를 파견하였고, 그 아래에 주, 부, 군, 현을 두는 한편, 향, 소, 부곡이라 하여 천민이 거주하는 특수 행정 구역도 두었다. 그러나, 모든 군, 현에 관리를 파견한 것이 아니고 중요한 군, 현에만 파견하여 그 곳을 중심으로 행정 체계를 유지하였다. 양 계는 군사적으로 중요한 북방 국경 지대와 동북 해안 방면에 두고 병마사를 보내 다스렸는데, 그 아래에는 대부분 진을 배치하였다.

군사 제도는 중앙의 2군 6위와 지방의 주현군으로 되어 있었다. 중앙군인 2군은 왕실을 지키는 임무를 맡았으며, 6위는 수도 방어와 국방의 임무를 맡았다. 2군 6위의 지휘관인 상장군, 대장군은 최고 국방 회의인 중방에 모여 군사 문제를 논의하였다. 지방군인 주현군은 지방에서 국방의 임무를 수행하는 동시에 잡역을 하였다.

국자감과 과거

태조 때에 이미 개경과 서경에 학교가 설립되었는데, 성종 때에 이르러서는 일종의 국립 대학인 국자감이 개경에 세워졌다. 국자감은 유학의 경전과 문예를 가르치는 국자학, 태학, 사문학과, 기술 부문의 교육을 맡은 율학, 서학, 산학으로 나누어졌다. 인종 때에는 지방 교육을 강화하기 위하여 향학을 세웠다. 이 때의 교육은 관리를 양성하는 데에 큰 비중이 주어졌으므로, 교육 제도는 과거 제도와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

과거에는 문예를 시험하는 제술과, 유교의 경전을 시험하는 명경과, 그리고 의학, 법률, 산술 등을 시험하는 잡과, 승려를 위한 승과 등이 있었다. 무신 등용을 위한 무과는 고려의 마지막 임금인 공양왕 때 생겼기 때문에, 고려 시대에는 거의 시행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고려 때에 관리로 등용되는 길은 과거를 통한 길 외에, 5품 이상 귀족의 자제를 특별히 채용하기 위해 마련한 음서 제도를 통한 길이 있었는데, 음서의 길이 널리 이용되었다.

전시과

고려의 토지 제도는 경종 때에 마련된 전시과를 토대로 하여 정비되었다. 전시과는 관리들의 지위를 18등급으로 나누어, 등급에 따라 일정한 토지와 임야를 나누어 주는 제도였다.

토지를 분배받은 관리들은 그 토지를 농민들에게 경작시켜 조를 받아 생활하였다. 전시과의 토지는 세습할 수 없으며, 본인이 죽으면 나라에 반납하였다.

그리고, 5품 이상의 관리에게 지급되는 공음전이 있었는데, 이것은 자손에게 상속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공음전은 조상의 덕으로 관리가 되는 음서 제도와 함께 고려 귀족 사회의 한 특징이었다. 이 밖에, 왕실의 비용을 마련하기 위한 내장전과, 관청의 경비를 마련하기 위한 공해전이 있었으며, 또 사원에 딸린 사원전이 있었다.

학습 정리

1. 고려 태조 왕건은 후삼국의 분열을 통일하여 민족의 재통일을 이룩하였다.

2. 국초에는 호족의 세력이 강해 왕권이 미약했으나, 광종, 성종의 개혁으로 왕권이 안정되어 갔다.

3. 고려의 관료는 과거와 음서에 의해 선발, 임명되었다.

4. 고려의 토지 제도는 전시과를 토대로 유지되었고, 또 새로운 관리 등용법인 과거제의 실시는 왕권을 강화하였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