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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고려 후기의 사회와 문화

〔학습 개요〕

무신의 난 이후, 고려는 사회, 경제, 문화 등 각 방면에서 그 전과는 퍽 다른 모습을 보였다. 정치⋅경제면에서는 무신이나 친원 세력가들이 권력을 잡았다. 불교계에서는, 문신 귀족과 가깝던 교종이나 천태종보다는 심성의 도야를 주장하는 조계종이 무신들의 지원을 받으며 융성하였다.

대장경판 간행에 따른 목판 인쇄술의 발달은 활자의 발명을 촉진시켜, 세계에서 최초로 금속 활자를 발명하게 하였다.

한편, 여⋅원 문화의 빈번한 교류로 목화와 화약 제조 기술이 수입되었고, 성리학이 보급되었다. 성리학은 그 후, 무신 정권 이래 성장하고 있던 신진 관료들의 사상적 배경이 되었다.

학습 문제

1. 무신 정권 성립 이후의 고려 사회에는 어떠한 변동이 있었을까?

2. 고려 불교는 사회와 문화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을까?

3. 고려 후기의 사회와 문화는 전기와 어떻게 달라졌을까?

4. 세계적으로 자랑할 수 있는 고려 시대의 문화 유산에는 어떠한 것이 있을까?

권문 세가

무신의 난 이후, 고려 사회의 지배층에 변화가 생겼다. 즉, 무신의 난 이전의 사회의 지배층은 가문을 중요시하는 문신 귀족들이었다. 따라서, 이들 외에는 높은 관리가 되거나 경제적인 특권을 가지기가 매우 어려웠다.

그러나, 무신 정권 이후에는 이제까지 문신들에게서 멸시와 천대를 받던 무신들이 정권을 잡았으며, 원의 압력을 받던 시기에는 친원 세력이 권력을 잡았다.

권문 세가들은 넓은 농장과 많은 노비를 소유하고 경제적인 특권을 누렸다. 농장은 소작인이나 노비에 의해 경작되어 전시과는 거의 무너졌다. 그리하여, 국가의 재정은 큰 타격을 받았고, 새로 관리가 된 사람들은 국가로부터 토지를 지급받지 못하여 가난한 생활을 면하지 못하였다.

고려 말 토지 제도의 문란상

말기에 이르러 덕을 잃어 토지 대장이 불명하매 평민은 모두 큰 세력가에 속하게 되고, 전시과는 폐하여 사전이 되었다. 권력가들의 토지는 광대하여 산천으로 표를 삼고, 징세를 한 해에 수삼 차에 걸쳐 함에 이르러 나라의 법이 무너져 나라도 망하게 되었다.

고려사 식화지(토지 제도) 서문에는 고려 말 토지 제도의 문란상을 위와 같이 설명하였다.

한편, 고려 후기에 이르러서는 성리학을 공부하여 학문적인 교양을 갖추고 행정적인 실무에도 밝은 새로운 관료들, 즉 신진 사대부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주로 지방의 향리 출신으로서, 과거에 합격하여 중앙 정계에 진출한 사람들이었다. 이들 신진 사대부들은 넓은 토지와 농장을 가진 권문 세가들과 대립하게 되었다. 따라서, 고려의 사회와 문화는 커다란 갈등을 겪게 되었다.

성리학의 수용

무신 정권이 성립되자 문신들이 크게 화를 입어, 유학은 큰 타격을 받고 쇠퇴하였다. 최씨 무신 정권 시대에도 최우 같은 이는 문인들을 가까이하려 하였지만, 유학은 크게 발전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무신 정권이 무너지고 문신의 세력이 다시 일어나자, 유학은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충렬왕은 학문을 진흥시키기에 노력하였고, 충선왕은 원의 수도인 연경에 만권당을 설치하여 학자들의 학문 활동을 도왔다.

고려 후기 유학의 특징은 성리학이 전래된 데 있었다. 성리학은 송의 주희가 집대성한 것으로서, 송학 또는 주자학이라고도 하였다. 이것은 글귀의 해석 등에 치중하던 종래의 유학과는 달리, 우주와 인간의 근본 문제를 탐구하는 철학적인 면을 강조한 것이다.

성리학을 처음 소개한 이는 충렬왕 때의 안향이며, 그 후 충선왕 때에 백이정이 원에 가서 이를 직접 배워 왔고, 이제현은 충선왕을 따라 연경에 가서 성리학을 배워 왔다. 말기에는 이색, 이숭인, 정몽주, 길재와 같은 학자들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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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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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에 등장한 신진 사대부들은 대부분이 성리학을 공부하였다. 이들은 불교의 폐단과 모순을 지적하고, 또 불교를 옹호하는 권문 세가 및 사원을 공격하면서 그 세력을 급속히 넓혔다. 그리하여, 정도전, 조준 등 성리학을 신봉하는 신진 사대부들이 홍건적과 왜구의 격퇴에 큰 공을 세운 이성계와 손을 잡고 세력을 잡게 되었다.

조계종과 대장경

문신의 난 이후 불교계에서는, 종래의 교종 세력이 약화되고, 심성의 도야를 강조하는 선종이 크게 유행하였다. 이 때, 선종의 여러 종파가 조계종으로 통합되어 세력을 떨침으로써 불교계는 그 성격이 달라지게 되었다.

조계종을 확립하여 선종의 융성에 크게 이바지한 이는 보조국사 지눌이다. 그는 인간의 마음은 곧 부처의 마음이라고 가르치고, 이를 깨닫기 위하여 꾸준히 수양하며 노력하라고 설법하였다. 또, 인간의 본성을 터득하기 위한 수양의 방법으로서 참선과 함께 염불과 간경을 강조하였다.

의천의 천태종이 교종의 입장에서 교종과 선종의 일치를 주장한 것이라면, 지눌의 조계종은 선종의 입장에서 선종과 교종의 조화를 주장한 것이다. 지눌 이후의 이름난 승려로서는 고려 말의 태고, 나옹 등이 있었다.

고려 초기에 부처의 힘을 빌어 외적을 막고자 하는 의도로 만들어진 대장경판은, 그 뒤 몽고 침입 때에도 만들어졌다. 고려는, 몽고의 침입을 받아 강화도에 피난 중인 어려운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세계적 자랑거리인 고려 대장경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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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대장경 판목
고려 대장경 판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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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중에도 이 거대한 사업이 완성될 수 있었던 것은, 당시의 사람들이 부처의 힘을 빌어 적의 침략을 물리치겠다는 굳은 신앙심과 국난 극복의 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려의 불교는 사회⋅문화 발전에 이바지한 공이 매우 컸다. 그러나, 후대에 내려오면서 여러 가지 폐단이 나타났다. 즉, 불교 사찰은 국가와 민간으로부터 기부받은 많은 면세 토지와 함께 여러 가지 세속적인 사업을 하여 큰 재산을 소유하게 되었다. 승려들도 종교적인 면보다는 세속적인 일에 열중하여 많은 토지와 노비를 가지려 하였고, 때로는 민간 사회에 여러 가지 폐단을 자아내기도 하였다. 이에, 불교의 폐단을 비판하는 주장이 일어나게 되었다.

문학과 역사학

무신의 난으로 한때 침체되었던 문학은, 최씨 정권이 확립되면서 다시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이 때의 문학은 이른바 패관 문학이라 하여 주로 전설과 설화를 다룬 것이었다. 이인로의 파한집, 이규보의 백운 소설, 최자의 보한집, 그리고 이제현의 역옹패설 등은 이러한 문학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이 밖에,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 이색의 목은집, 정몽주의 포은집 등은 유명한 문집으로 남아 있다.

특히, 이러한 패관 문학은 현실을 벗어나려는 일면도 가지고 있지만, 대개는 강렬한 자주 의식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동국이상국집에 실려 있는 동명왕편은 주몽을 노래한 영웅적인 서사시로서, 고구려의 전통을 노래하여 역사 의식을 일깨워 주려는 것이었다.

동명왕편

…햇빛 받아 주몽 낳으니 이 때가 계해년, 골격이 특이하고, 우는 소리 또한 컸다. 처음에 알 낳으니 보는 이 모두 놀라, 임금은 불길하다고 이것 어찌 인류될꼬, 말우리에 던져 두니 모든 말이 밟지 않고, 깊은 산에 버렸더니 온갖 짐승 지켜 준다. 어미가 거둬 길러 달포 되니 말을 하되, 파리놈이 눈에 덤벼 편안히 잠 못 자오. 활과 살을 지어 주니 백발 백중 하는구나.…

동명왕편 이규보의 문집인 동국이상국집에 실린 5언으로 된 서사시이다. 고구려의 건국 설화를 노래한 것으로, 민족의 오랜 역사를 자랑하고 있다.

역사에 관한 저술로는 삼국유사가 가장 유명한데, 이것은 충렬왕 때 승려 일연이 지은 것으로, 단군 기록과 불교 관계의 설화, 향가 등이 실려 있다. 특히 단군에 관한 기록은, 당시 몽고족의 침입을 받아 쓰라린 시련을 겪던 우리 민족의 민족적 자각과 자부심을 불러일으켰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이 밖에, 이승휴의 제왕운기와 각훈의 해동고승전의 일부도 남아 있어 역사 연구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열국기

태조님 원수 되어 싸움 없이 다 누르니 공업은 불꽃 일듯. 궁예는 포악하더니 민심은 물이 끓듯. 이 때에 4공신은 도탄 민생 탄식하고, 무인년 유월 보름, 단연히 거사하여 태조 거소 나아가서 대위에 추대하다. 기약 없이 모인 수가 3천의 보병, 기병, 가물에 망운하듯 온세상 기쁨이라.

제왕운기 이승휴 지음. 우리 나라와 중국의 역사가 한시로 기록되어 있다. 위의 내용은 고려 왕계를 기록한 것 중에서 태조에 관한 부분이다.

금속 활자

우리 나라 인쇄술의 전통은 매우 오래 되었다. 불국사 3층 석탑에서 다라니경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통일 신라 시대에 이미 목판 인쇄 기술이 발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고려 때에는 이 목판 인쇄 기술이 더욱 발전되어, 세 차례에 걸친 대장경 간행 사업이 완수되었다.

목판 인쇄술의 발달은 활자의 발명을 촉진시켜, 13세기 초에는 금속 활자를 사용하는 인쇄술을 발전시켰다. 즉, 고종 21년(1234)에는 금속 활자를 사용하여 상정고금예문이라는 책을 간행하였다. 이것은 세계에서 금속 활자에 의한 인쇄의 시초로서, 서양보다 200여 년이나 앞서는 것이다. 그 후, 활자 인쇄술은 더욱 보급되어, 공양왕 때에는 활자로 인쇄하는 서적원까지 두었다.

고종 때에 찍었다는 상정고금예문은 현재 전해지지 않으나 1377년에 간행된 금속 활자본인 직지심경이 현재 남아 있는데, 이것은 세계 최고의 금속 활자본으로, 우리 민족의 귀중한 문화 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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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지심경
직지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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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면과 화약

고려와 원의 관계가 밀접해지자, 두 나라 사이에는 빈번한 문화 교류가 있었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리학, 목화, 화약의 전래이다.

목화는 공민왕 때에 문익점이 원에 사신으로 갔다가 그 씨를 가져와 그의 장인 정천익이 재배에 성공함으로써 보급된 것이다. 목화의 보급에 따라 씨아와 물레가 만들어졌다. 목화의 보급은 우리 나라의 의생활에 큰 변화를 가져오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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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화 시배 사적비
면화 시배 사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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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약은 최무선이 중국 상인에게서 그 만드는 법을 배웠다. 그는 화통도감을 만들게 하고 각종 화포를 만듦으로써 왜구를 소탕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나아가, 화약은 우리 나라의 무기 제조 기술과 전투 기술에 큰 혁신을 가져왔다.

이러한 여⋅원 문화의 교류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천문, 수학, 의학 등 발달된 사라센 문화가 고려에 전해져서 당시의 과학 기술 문화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에 따라 고려의 천문과 의학 기술이 크게 향상되었다.

건축과 예술

현재까지 남아 있는 고려 시대의 목조 건물로는 안동 봉정사의 극락전, 영풍 부석사의 무량수전과 조사당, 예산 수덕사의 대웅전이 유명하다. 이들 건물의 기둥은 가운데를 불룩하게 한 엔타시스(배흘림) 양식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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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사 무량수전(상)과 그 실측도(하)
부석사 무량수전(상)과 그 실측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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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탑으로는 목조 건축의 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는 경천사 10층 석탑이 유명하다. 이 탑은 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그 양식은 조선 시대의 원각사지 10층 석탑으로 계승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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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천사 10층 석탑
경천사 10층 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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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고려 청자는 인종, 의종 때를 거쳐, 강화 시대에 이르러 그 전성기를 이루었다. 그러나, 고려자기는 이후에 기술적 발전을 보지 못하여 말기에는 쇠퇴하였다.

그림에 있어서는 명종 때의 이광필과 고유방이 유명하였고, 공민왕이 그렸다는 천산대렵도 및 수덕사와 부석사의 조사당 벽화가 지금도 남아 있다.

한편, 고려에서 건너가 일본에 남아 있는 여러 점의 불교 회화는 매우 호화롭고 정교하여, 이 시대 그림의 성격을 잘 보여 주고 있다.

글씨로는 신품 4현의 한 사람인 최우가 있었고, 서체는 전기에 유행한 구양순체와 왕희지체 대신에 후기에는 조맹부체가 유행하였다.

음악은 우리 나라의 향악과 중국 음악인 당악이 있었으며, 송에서 대성악이 수입되어 궁중 음악으로 발달하였다. 향악곡으로는 동동, 대동강, 한림별곡 등이 있었다. 이와 함께 산대놀이라는 가면극이 유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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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림별곡
한림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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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 정리

1. 고려의 불교는 교종과 선종의 융합에 노력하는 한편, 대장경을 간행하였다.

2. 사대부들은 성리학을 사상적 배경으로 한 신진 세력으로, 새 사회 건설을 위한 노력을 폈다.

3. 고려 후기의 역사는 시련기를 맞은 우리 민족의 주체적 자각을 깨우쳐 주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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