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말의 정세

공민왕의 개혁 정치가 권문 귀족 세력들의 반대로 실패로 돌아간 후, 고려는 안팎으로 더욱 어려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북으로는 홍건적의 침략을 거듭 받았고, 남으로는 왜구가 연안의 각지를 노략질하며 침범했는데, 그들은 때로 내륙까지 쳐들어와 피해를 입혔다.

한편, 안으로는 오랜 세월을 두고 권세를 잡아 온 구 귀족과, 새로이 과거에 급제하여 중앙 정계로 등장한 신진 세력 사이에 정치적 대립이 생겨 혼란을 빚었다.

신진 세력들은 대체로, 원으로부터 전해진 성리학을 공부하고 과거를 거쳐 벼슬길에 올라선 이른바 사대부들이었다.

이들은, 안으로 고려 왕국이 겪고 있는 어려움을 과감히 해결하고, 새로운 국가 활동을 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 중심 인물이 조준, 정도전 등이었다.

이들은 이성계와 손을 잡고 기울어진 고려의 정치적 실권을 잡으려고 하였다. 이 때에 이성계는 북쪽에서 침입해 들어오는 나하추의 세력을 물리치고, 남쪽으로부터의 왜구의 침입을 거듭 격파하여 용맹을 떨치면서 중앙 정계로 등장하고 있었다.

조선의 건국

몽고족의 지배에서 벗어나 새로 등장한 명은 원을 몽고로 몰아 내고, 차차 만주로 진출하였다.

명은 우왕 때, 고려에 대하여 한때 원이 지배한 일이 있는 철령 이북의 우리 땅을 넘겨 줄 것을 요구하였다. 당시 고려의 실권을 쥐고 있던 최영은 이를 거절하고, 먼저 요동 지방을 공격하려 하였다.

이 때, 국제 정세의 흐름과 국내 사정을 이유로 요동 공격을 반대했던 이성계는, 출정 도중 위화도에서 군사를 돌려 개경으로 돌아와, 반대 세력을 물리치고 실권을 잡았다.

고려의 실권을 잡은 무인 세력과 유교적 신진 세력은 불교 세력과 구 귀족 세력을 물리치는 한편, 그들의 경제적 기반을 다지기 위해 과전법을 실시하였다.

과전법에 의한 토지 개혁으로 구 귀족은 군사권과 정치권에 이어 경제적 기반마저 잃게 되어 무력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어서, 신진 사대부 세력은 새 국가 건설의 꿈을 이루기 위하여 정몽주 등 일부 세력의 반대를 물리치고, 마침내 이성계를 국왕으로 추대하고 조선을 세웠다(1392).

왕권의 확립

유교적 이상 정치인 덕치주의를 내세우고 건국한 조선은, 이후 1세기 동안 적극적인 국가 활동을 펴 왕권을 튼튼히 하고, 중앙 집권적인 국가로 발전하였다.

태조는 서울을 개경에서 한양으로 옮겨 한성부라 칭하고, 국가 활동의 새 중심지로 삼아 민심을 새로이 수습하였고, 유교로써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 원리로 삼았으며, 농업을 적극 장려하여 국민 생활의 안정에 노력하였다.

관료 조직과 토지 제도가 갖추어지면서 왕권을 중심으로 한 중앙 집권적 국가 조직이 가다듬어졌다. 태종 때부터의 노력은 세종, 세조를 거쳐 성종 때에 이르러 유교적인 집권 국가로서의 모습을 갖추었다.

태종은 사병 제도를 철폐하여 병권을 국왕에게 집중시켰다. 또, 호패법을 실시하여 전국의 인구 동태를 파악하여 세납과 군역의 의무 부과에 활용하는 한편, 의정부와 6조 제도에 의한 중앙 정부의 관제를 정비하였다. 또, 불교를 정리하여 유교 정치를 펴는 데 힘썼다.

조선은 태종 때에 다져진 정치⋅경제⋅군사적 안정을 바탕으로 하여, 세종 때에는 더욱 튼튼한 기틀 위에서 민족 문화의 발전을 밀고 나갈 수 있었다.

세종은 유능한 재상들과 젊고 재주 있는 학자들을 잘 이끌어 민생 복지에 힘쓰고, 민족 문화를 크게 발전시켰을 뿐 아니라, 국토를 압록강, 두만강 선으로 확장하였다.

그 후, 세조가 왕위에 오른 후, 성삼문 등 사육신을 제거하고 왕권을 강화하였으며, 두 차례에 걸친 동북 지방의 반란을 진압하고 중앙 집권을 튼튼히 하였다.

경국대전

조선은 갖추어진 법전에 의해 제도를 마련하고 행정을 펴 나간 법제 국가였다. 국초에 국가의 기본 법전을 갖추고자 힘쓴 이는 정도전이었다.

그는 고대 중국의 6전을 토대로 하여 우리 나라의 실정에 알맞은 법 조직을 마련하고자 조선경국전, 경제문감 등을 펴냈다. 그의 노력으로 나라의 법 조직이 가다듬어졌으나, 그 후 국가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새로운 법령이 더욱 많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세조 때에 이르러 이미 만들어진 여러 법령과 교령을 종합하여 항구적인 법전을 마련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와, 조선의 법전을 집대성하는 작업이 시작되어 성종 초에 완성되었다.

이, 호, 예, 병, 형, 공의 6전으로 구성된 이 경국대전은 조선의 국가 조직과 사회⋅경제 활동에 대한 기본 법전이다. 그 후, 시대가 흐름에 따라 더러 수정이 가해지기는 하였으나, 경국대전은 조선의 기본 법전으로서의 자리를 지켰다.

경국대전의 편찬으로 조선의 정치 제도의 정비 작업은 일단락지어졌고, 유교적인 법치 국가로서의 자리를 확고히 할 수 있었다.

의정부와 6조

조선의 정치는 국왕을 중심으로 한 관료에 의해 지배되었으나, 정치의 이상을 유교적 덕치에 두고, 민생의 안정을 앞세웠다.

관료는 동반(문반)과 서반(무반)으로 구분되어 있었으며, 관직은 중앙 관직과 지방 관직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관료는 원칙적으로 과거를 거쳐 선발되었으나, 일부는 조상의 공로에 의해 임명되기도 했다. 모든 문무 관료는 18등급으로 나누어져 있는 품계에 따라 그 직분의 높고 낮음이 구별되었다.

그리고, 국왕 중심의 정치였다고 하나, 정책의 결정은 의정부의 3정승(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의 합의에 의해 국왕의 결재를 받았다.

국왕의 정책 결정이 잘못되었을 때에는 사간원이 간언을 올릴 수 있었고, 국민들에게도 정치적 의견을 제시할 수 있도록 상소의 길이 열려 있었다.

국가 활동은 경국대전에 터전하여 조직되고 운영되었는데, 통치 조직은 왕권 아래에 집중되도록 짜여졌다.

의정부가 정책 조정 기관으로 정치적 결정을 이루면, 그 아래의 6조가 행정 실무를 나누어 맡아 집행하였다. 이, 호, 예, 병, 형, 공의 6조의 장관을 판서라 했는데, 이는 오늘날 각 부의 장관에 해당하는 관직이다.

행정 사무를 담당한 6조 외에도 특수한 직무를 담당하는 여러 기관이 있었다.

국왕의 자문 기관이라 할 홍문관, 관료를 감찰하는 사헌부, 국왕의 잘못을 일깨워 주는 사간원은 3사라고도 불리는 중요한 기관이었다.

이 밖에, 국왕에 직속된 사법 기관인 의금부와 국왕의 비서 기관이라 할 승정원, 그리고 역사의 기록을 담당하는 춘추관이 있었고, 서울의 행정을 맡아 보는 한성부가 있었다.

고을과 수령

전국을 8도로 나누고, 각 도에는 중앙에서 관찰사(감사)를 보내어 도의 행정을 맡아 보게 하였다.

도는 다시 여러 고을로 구분하였는데, 고을의 격에 따라 부, 목, 군, 현의 구별을 두고, 부사, 목사, 군수, 현령을 중앙에서 임명하였다. 이들 고을의 으뜸인 수령(흔히 원님이라 함.)은 행정뿐만 아니라 치안과 사법도 담당하였다.

이들 지방관은 법이 정하는 바에 따라 농업의 진흥, 교육의 장려, 호구의 조사, 부역의 공평, 재판의 공정 등에 힘써야 했으며, 조세 및 공납의 징수와 수송의 책임도 지니고 있었다.

수령은 각 고을에서 왕권을 대리하나, 임기에 따라 이동하기 때문에 지방 실정에 어두운 일이 많았다. 따라서, 지방 행정의 실무는, 그 지방 출신의 향리들이 6방에 소속되어 수령을 보좌하면서 집행하였다.

한편, 고을마다 지방 양반들의 조직인 향청이 있었는데, 그들은 수령을 도우면서 향리를 감찰하고, 지방의 풍속을 돌보는 임무를 맡아 보았다.

지방 행정은, 이와 같이 수령과 향리, 그리고 지방 양반들이 서로 협조해 가며 수령 책임하에 집행될 수 있도록 조직되어 있었다.

5위와 군정

무반의 최고 기관으로서는 중추원이 있었으나, 실무를 담당하는 기관은 아니었다. 세조 때에 설치된 5위 도총부가 군사의 최고 지휘권을 쥐고, 중앙의 다섯 부대인 5위와 각 지방의 부대를 통솔하였다.

지방 각 도에는 병마 절도사(병사)와 수군 절도사(수사)를 파견하여 각각 육군과 수군을 통솔하게 하였다. 한편, 국방상 요지에는 진과 보를 설치하여 부대를 주둔시켰다.

특히, 함경도에는 여진족에 대비하기 위하여 병영을 두 곳에 설치하였고, 경상도와 전라도에는 왜구에 대비하여 수영을 두 곳씩 설치하여 국방을 튼튼히 하였다.

5위의 갑사나 정병, 각 진과 영의 군인들 중에는 시험을 통해 선발된 직업 군인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병역의 의무를 지닌 장정 중에서 뽑은 정군들이었다.

16살에서 60살까지의 양인 장정들을 정남이라 했는데, 이들은 정군으로 직접 병역의 의무를 지거나, 정군의 경비를 담당하는 봉족이 되어 간접적으로 병역의 의무를 이행해야 했다.

국경 지방에서 발생하는 국방상의 긴급 사태를 횃불이나 연기로 급속히 중앙에 연락하기 위한 봉수 제도나, 국경 지방과의 교통 통신을 급속히 취하기 위한 역마 제도 등도 군사 조직의 하나였다.

과거 제도

모든 관료는 원칙적으로 과거를 통해 등용되었다. 관료는 국가로부터 생활의 기반이 되는 토지를 지급받고, 각종 특권을 인정받아 지배 계층으로서의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따라서, 양반 유생들은 과거에 합격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과거는 문과, 무과, 잡과로 구별되었는데, 이 중에서 문관 시험인 문과가 가장 중요시되었다. 문과에는 주로 양반 자제가 응시하였으나, 무과에는 향리나 양인들도 응시할 수 있었다. 잡과에는 그 성격에 비추어 주로 중인이 응시하였다.

과거는 3년에 한 번씩 실시하는 것이 원칙이나, 여러 가지 부정기적인 시험도 있었다.

문과의 소과는 진사와 생원 자격을 얻는 자격 시험이었고, 이 소과에 합격한 사람과 성균관 학생들은 대과에 응시할 수 있었다. 대과에 응시한 사람은 초시, 복시를 거쳐 전시에서 등급을 판결받아 적합한 관직을 받았다. 장원 급제자는 3일 유가의 영예를 누리고, 중요한 관직을 받았다.

성균관과 향교

조선은 유교주의 국가였다. 따라서, 교육의 목적도 유교적 학식의 수양과 함께, 유교주의에 입각한 왕도 정치의 실현을 위한 유능한 관료의 양성에 있었다.

교육의 기회는 양인에게도 주어졌으나, 실제로는 양반 자제들에게 국한되었다.

초등 교육은 서당이나 가정에서 받았다. 문자를 익히고 유학의 초보적인 지식을 쌓은 후, 서울에서는 4부 학당, 지방에서는 고을마다 설치되었던 향교에 들어가 중등 정도의 유학 교육을 받았다.

서울의 성균관은 국립 최고 교육 기관으로서, 소과에 합격한 진사, 생원이나 그 밖의 학생을 받아 높은 수준의 유학 교육을 실시하였다.

의학, 법학, 천문학, 산학이나 외국어 등의 기술 교육은 각기 그 일을 맡아 보는 관청에서 별도로 실시하였다.

초기의 대외 관계

조선은 안으로 나라의 기틀을 바로잡는 한편, 밖으로 이웃 나라와의 평화에 힘썼다. 그리고, 필요에 따라서는 실력으로 우리의 국토를 확장하는 정책을 펴 나가기도 하였다.

명에 대해서는 명분을 살려 주면서, 사신의 왕래를 통하여 경제적, 문화적 실리를 취하는 외교 활동을 폈다. 태조 때에는 우리 나라가 요동 지방을 되찾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였기 때문에 명과의 사이가 좋지 않았으나, 태종 이후에는 친선 관계가 유지되어 명이 망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국초에 명과 평화적인 친선 관계를 맺음으로써 나라 안의 일을 적극적으로 펴 나갈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정치와 문화를 발전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다.

한편, 일본과 여진에 대해서는 강경과 회유의 양면 정책을 폈다.

일본은 당시 내란이 계속되어 국내가 몹시 혼란하였는데, 그 틈에 우리 해안을 노략질하는 왜구들이 끊이지 않았다.

세종 때에는 왜구의 근거지인 쓰시마 섬을 정벌하는 한편, 그들의 청을 받아들여 일본인이 출입하여 통상할 수 있는 3포(제포, 부산포, 염포)를 개항해 주었다. 그 후, 3포에 일본인이 거주하게 되면서 이들로 인한 폐단이 생기자, 이들의 무역 활동을 제한하는 새로운 약조를 맺었다.

북방의 야인은 여진족으로서, 이들은 고려 말의 어수선한 틈을 타서 자주 북방을 시끄럽게 하였다. 태조 이후로, 야인들 가운데 귀순하는 자들에게는 관직을 내리고 생활 물자를 나누어 주는 한편, 경성, 경원에서 교역할 수 있게 해 주었다.

4군과 6진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에 흩어져 살고 있던 여진족이 소란을 피우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 세종은 조상들이 활동하던 옛 땅을 한 치라도 버려 둘 수 없다는 신념에서 적극적인 북방 개척 정책을 폈다. 즉, 최윤덕 등으로 하여금 여진족을 압록강 이북으로 내몰게 하여 그 땅에 서북 4군을 설치하였으며, 강 유역의 여진족에 대해서는 김종서 등으로 하여금 동북 6진을 설치하게 하였다. 이 4군과 6진의 설치로 두만강, 압록강을 경계선으로 하는 오늘날의 우리 국토가 이루어졌다.

세종은 4군과 6진의 설치에 그치지 않고, 여러 해를 두고 새로 개척된 동북 지방에 남쪽 사람들을 이주, 정착하게 하여 국토를 개발하는 사민 정책을 썼다. 그리하여, 한반도 전역을 우리 겨레의 실질적인 생활 무대로 확보하였다.

세종 이후에도 여진족은 자주 북쪽 국경을 넘나들어 한때는 서북 4군을 철폐한 일도 있었지만, 그것은 행정상의 일시적 변동으로서, 결코 영토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