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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양반 사회의 변천

〔학습 개요〕

조선은 유교를 받드는 사대부 세력에 의하여 건국되었다. 새 왕국을 세운 사대부 세력은 유교의 왕도 정치를 이상으로 삼고 그것을 이루기 위하여 국가를 조직하고, 민본 정치를 내세웠다.

조선 사회는 양반을 지배층으로 한 신분 사회였다. 양반, 중인, 상민, 천민의 신분이 차차 굳어졌고, 신분에 따라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생활까지도 차별되는 사회적 모순이 있었다.

양반만이 행세할 수 있는 사회, 소수의 관료를 중심한 지배 조직이 안고 있는 약점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여러 모로 드러나게 되어, 마침내 사화와 당쟁이 벌어져 혼란을 빚었다.

학습 문제

1. 조선 시대 사회 생활의 바탕을 이루었던 사상은 어떠한 것이었을까?

2. 조선 시대에 백성의 의무와 권리에는 어떤 것이 있었을까?

3. 사화나 당쟁이 일어나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숭유 억불 정책

조선을 건설한 유교 세력은 국초부터 불교를 배척하고 성리학적 유교를 받드는 숭유 억불 정책을 썼다.

승려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허가를 얻어야 하는 도첩제를 실시하여 승려의 수를 줄였고, 사찰의 증설을 제한하였다. 태종 때에는 전국의 사찰 수를 2백여 곳으로 제한하는 한편, 사찰의 토지나 노비를 몰수하기도 하였다.

세종은 국민에게 주자가례에 의한 유교적인 관, 혼, 상, 제의 의례를 따르도록 하고, 불교적 예속을 금하였다. 국왕 중에는 불교를 믿어 궁중에 불당을 세우거나, 불교 서적을 한글로 펴내는 등 불교를 후원한 경우도 더러 있었으나, 그것은 개인적이고 일시적인 일로서, 숭유 억불 정책에 변화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정책으로, 삼국 시대 이래로 국민 생활과 밀착되어 있던 불교는, 차차 깊은 산중으로 밀려나 부녀자와 일부 서민층의 신앙으로 이어져 내려왔다. 그리하여, 불교와 귀족 중심의 사회가 유교와 양반 중심의 사회로 변하고, 불교 문화는 쇠퇴하게 되었다.

신분 제도

조선은 양반 중심의 사회였다. 양반이란, 원래 문관 벼슬을 가리키는 동반과 무관 벼슬을 가리키는 서반을 함께 부르던 말로, 관직을 차지한 지배자들을 통틀어 부르는 말이었다. 이것이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는, 벼슬하는 사람만이 아니라 벼슬을 할 수 있는 신분을 가리키는 말로 그 뜻이 변했다.

양반은, 조선 초기만 해도 천인에 대한 양인이라는 신분에 속하는 관직자를 가리켰던 것이나, 왕권이 확고해지고 관료 조직이 굳어져 가는 가운데 관직자들은 지배층으로의 사회적 지위가 높아졌으며, 마침내 향리나 농민과 뚜렷이 구별되는 신분으로서의 자리를 굳혔다.

하급 관리, 지방 행정 협력자, 기술 관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별도로 중인이라는 신분을 이루었고, 농업과 상업, 수공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이른바 상민이 되었다. 한편, 그 아래에는 원래부터 차별을 받아 오던 천민의 신분이 있었다.

그리하여, 유교적 조선 사회에서는 양반, 중인, 상민과 천민의 네 가지 사회 신분이 굳어졌다. 이러한 사회적 신분은 세습되는 것이어서,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신분의 변화를 기대할 수가 없었다.

신분은 직업과 밀접하게 관련되며, 그 신분에 따라 사회적 대우는 물론, 일상 생활에까지 여러 가지 차별이 뒤따랐다. 그러나, 이러한 차별적인 신분 제도를 당시의 사회에서는 옳다고 보았으므로, 오늘날의 민주주의 사회와는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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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인 양반 집의 구조
대표적인 양반 집의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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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과 중인

양반은 독서를 하거나 관직에 종사하는 지배 계층으로, 농업, 공업, 상업 등의 활동이나 기술직에 관계하지 않았다. 양반은 유교적 내용을 담은 경서와 역사 기록인 사서를 주로 읽고, 과거에 응시하여 벼슬길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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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직의 사령장
관직의 사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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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을 다루는 일은 일상 생활에서 중요한 일이나, 조선 사회에서는 기술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중인 신분에 속하였다. 중앙이나 지방 관청의 행정 실무를 담당하는 서리, 그리고 하급 장교인 군교들도 중인이었다. 중인의 직업은 원칙적으로 그 자손에게 세습되었다.

상민과 천민

백성의 대부분은 상민이었다. 상민은 농, 공, 상 등의 생산 활동에 종사하고, 국가에 대하여 전세, 공납, 부역의 의무를 부담하였는데, 그 대부분은 농민이었다.

농민은 자기의 토지를 경작하거나 개인 또는 국가 소유의 농토를 빌어 농사를 지었다. 상민의 일부는 수공업이나 상업에 종사하였다. 이들의 생산 활동이나 상업 활동은 정부로부터 통제를 받았다.

천민은 천한 신분이었다. 천민에는 공노비와 사노비가 대부분이었으며, 대대로 그 신분을 벗어나기가 어려웠다. 이 밖에, 광대, 사당, 무당, 창기, 백정 등도 있었다. 이 중에서 특히 노비는 공공 기관이나 개인에 소속되어 인격이 전혀 무시되었으며, 매매, 증여, 상속의 대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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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비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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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제도

조선 시대의 가족 제도와 도덕, 풍속 생활은 철저하게 유교적이었다. 가족 제도는 가장을 중심으로 한 대가족 제도였으며, 유교적 효의 정신에 입각하여 가장의 권한은 절대적이었다. 가장은 가족을 대표하고 거느리며, 조상에 제사지내는 일을 주관하였다.

혈통과 가문을 중히 여겨 동성 동본 간의 결혼이 금지되었고, 어버이에 대한 효와 지아비에 대한 순종과 정절이 중요시되었다. 따라서, 효도를 다한 효자와 정절을 지킨 열녀는 국왕에 충성을 바친 충신과 같이 국가적으로 표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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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려
정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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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사회적 활동은 허락되지 않았으며, 과부의 재혼도 금지되었다. 또, 적서의 차별이 엄격하였으며, 서자는 재혼한 여성의 자녀와 같이 여러 가지 사회 활동의 제한을 받았다.

양반은 반드시 가묘를 두어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야 했으며, 관, 혼, 상, 제의 예식은 모두 주자가례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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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지내는 모습
제사지내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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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적 예속과 생활을 펴기 위하여 향약이 조직, 운영되었으며, 유교적 도덕 정신과 예의 범절은 조선 사회에 큰 영향을 끼쳐, 자유로운 인간 활동을 제한하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충효스러운 국민 생활과 예의바른 사회 생활, 그리고 화목한 가정 생활을 뒷받침하기도 했다.

양반 사회

유교적 양반 사회는 여러 가지 모순을 안고 있었다.

첫째로, 성리학적 유교는 당시의 차별적인 신분 제도를 옳은 것으로 보고 있었다. 이러한 양반 중심의 사회에서는 신분의 차별, 직업의 귀천, 남녀의 구별 등이 있었으므로, 비록 재능과 슬기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자유로이 펼 수가 없었다. 태어날 때 속한 신분에 따라 사회 활동이 제한되고, 생활에 차별이 주어지는 그러한 사회였다.

둘째로, 유교적 양반 사회에서는 관직에 종사해야만 국가로부터 경제적 혜택과 사회적 특권을 얻어 넉넉한 생활을 하며 행세할 수 있었다. 양반이라 하더라도 관직에 오르지 못한 사람이거나, 말단 행정이나 기술 관직을 맡은 중인은 궁색하게 살기도 했다. 더우기 백성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상민과 천민은 무거운 의무를 지닌 채 어려운 생활을 해야 했다.

세째로, 관직의 수가 한정되어 있어서 일부 양반만 관직에 오를 수 있었다. 시대가 흐를수록 양반의 신분을 세습하는 사람이 많아지고 또 자주 시행되는 과거에 급제하는 사람이 많아짐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차지할 수 있는 관직은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관직에 오르지 못하는 양반이 늘어 갔다.

양반 사회가 안고 있는 이와 같은 결점으로 말미암아, 뒷날 정권과 관직을 둘러싼 대립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농장

조선 초기부터 과거나 음서(문음)를 통하여 계속 관직을 독점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이들은 나라에 공을 세워 공신전, 별사전 등을 받아 넓은 농토를 세습해 가며 부귀를 누리던 훈구파였다.

이들은 개간이나 매입, 또는 권세를 이용하는 등의 여러 가지 방법으로 남의 땅을 차지하거나, 농민들의 기탁을 받아 자신의 농토를 넓혔다.

이와 같이 그들은 국가의 토지 제도를 어기고 사사로이 토지를 확대, 지배하였는데, 이러한 농토를 농장이라 한다. 이들은 농민과 노비를 시켜 농사를 짓게 하고 부를 누렸다. 이러한 현상은 차차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후에 큰 문제를 자아내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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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작도
경작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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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들 훈구파와는 달리, 국초부터 지방에서 학문에 힘쓰며 제자를 키우던 학자도 있었다. 이들 지방에서 성리학을 공부하는 양반들이 늘어나게 되자, 이들을 사림파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들 사림파 학자들도 성종 때부터 중앙으로 진출하여 관직에 나서게 되자, 차차 훈구파와 대립하게 되었다.

성종 때부터 시작된 이들 신⋅구 관료 세력의 대립은 연산군 이후 네 차례에 걸친 사화로 폭발되었다. 사화는 신⋅구 관료 세력 사이에 벌어진 정권 싸움이었다. 이 싸움은 소수의 관료들 사이에 전개되었는데, 주로 신진 관료들이 화를 입었다.

사화와 당쟁

거듭되는 사화로 사림 출신 관료는 고난을 받았으나, 선조 때에는 중앙에서 자리를 굳히고 정권을 잡게 되었다. 정권을 잡은 후에는 이들 사림 정치가들 사이에서 정권 다툼이 벌어지니, 이 다툼을 흔히 당쟁이라고 한다.

지배층의 당쟁으로 그 때마다 옥사가 일어나 많은 사람들이 화를 입게 되고, 정권이 자주 바뀌면서 나라의 질서가 어지러워져서 정치와 사회는 혼란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선조 때의 동⋅서 분당 이후 당쟁이 오랫동안 계속되었던 것은, 각 당파의 인물들이 지방에 뿌리박고 있는 지방 세력과 연결되고, 농장이라는 경제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당쟁은 당시의 양반 사회가 내포하고 있던 정치 제도와 사회 생활 및 경제 생활의 모순에서 빚어진 것으로, 국가와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컸다.

당쟁이 양반 사회의 분열로 그치지 않고 국가, 사회에까지 미치는 영향이 커지자, 이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특히 이이는, 잘못된 옛날의 것을 고쳐서 새로운 정치와 사회를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학습 정리

1. 조선 사회는 유교적 예속과 도덕 생활을 지켜야 하는 유교 중심의 사회였다.

2. 양반과 천민의 구분이 뚜렷해지면서 양반, 중인, 상민, 천민의 사회 신분이 생겨났다.

3. 한정된 수의 벼슬 자리를 차지하고자 하는 양반들의 경쟁이 지나쳐 대립과 투쟁이 생겨나게 되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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