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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흥선 대원군의 정치

1. 흥선 대원군의 정치

〔학습 개요〕

세도 정치로 인한 사회의 혼란이 계속되고 각지에서 민란이 일어나 나라 안이 어지러울 때, 밖으로는 서양 세력이 침략의 위협을 주면서 다가와, 조선은 큰 어려움을 맞게 되었다.

이 때, 고종이 어린 나이에 즉위하자, 흥선 대원군이 정치를 맡아 안팎으로 닥친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고자 과감한 개혁을 추진하였다. 안으로는 세도 정치의 잘못을 바로잡고 정치를 안정시키기 위하여 여러 가지 개혁을 단행하였으며, 밖으로는 침략적 성격을 띠고 다가오는 서양 여러 나라와 일본과의 통상을 거절하고, 천주교를 박해하는 정책을 펴 나갔다.

그러나, 개혁 정치의 성과도 컸지만, 그에 따르는 폐단도 나타났다. 결국, 반대파에 의해 10년 만에 물러나고, 조선의 정국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학습 문제

1. 흥선 대원군이 집정할 당시 조선의 내정은 어떠한 상태였을까?

2. 흥선 대원군의 내정 개혁은 어떻게 추진되었을까?

3. 흥선 대원군의 대외 정책은 역사적으로 어떠한 의의를 지니고 있을까?

조선의 정세

1860년을 전후하여 조선은 안팎으로 어수선한 가운데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에 부닥쳐 있었다. 60여 년 간 계속되어 온 세도 정치로 나라의 기강이 흔들리고, 삼정의 문란으로 생활이 어려워진 농민이 늘어나는 가운데 각지에서 민란이 일어났으며, 농민들 사이에서는 새로운 사회를 꿈꾸게 하는 동학이 퍼져 나갔다. 이러한 민란이나 동학은 조선 왕조로 볼 때에는 크게 위험스러운 것이었다.

한편, 밖으로부터는 서양 여러 나라의 배가 자주 출현하여 통상을 요구하면서 위협을 주었고, 천주교가 각지로 퍼져 가고 있었다. 서양 세력이 중국을 침략하여 일으킨 아편 전쟁이나 애로우 호 사건과 같은 일들이 우리 나라에도 전해지고, 더우기 연해주를 차지한 러시아 인들이 두만강 하류를 넘나들게 되자, 서양 세력의 침투에 대한 두려움은 더욱 커졌다.

이러한 정세 속에서, 국민들은 정치 질서를 바로잡고 농민의 생활을 안정시켜 나라를 평안하게 하고, 서양 세력에 대처할 강력한 정책을 펴 나갈 것을 요망하게 되었다.

흥선 대원군

이러한 때에 철종이 돌아가고 고종이 어린 나이에 즉위하자, 그의 아버지 흥선 대원군이 정치적 실권을 잡게 되었다. 그는 외척 세도 정치로 인해 쇠약해진 왕권을 확립하고, 흐트러진 정치 질서를 바로잡아 어려워진 나라를 다시 일으키기 위해 과감한 개혁 정치를 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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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 대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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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세도 정치의 폐단을 없애기 위하여 그 동안 나라의 중요한 고관직을 독점해 온 안동 김씨 세력을 몰아 내고, 당파와 문벌을 가리지 않고 인재를 등용하였다.

또, 어려운 국가 재정을 해결하기 위하여 일반 평민들에게서만 받아 오던 군포를 동포(뒤에 호포라 함.)라고 하여 양반들에게도 부담시켰다. 한편으로는, 오랫동안 나라의 재정을 좀먹고 농민을 괴롭혀 왔던 전국의 서원을 유생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폭 정리하여 47개소만 남겨 놓았다.

그리고, 관리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던 부정과 부패의 풍조를 없애기 위해 관리의 기율을 엄하게 하여 새 기풍을 기르려 하였으며, 농민에게 커다란 피해를 주던 환곡제를 대폭 개혁하였다.

약화된 의정부의 기능을 관제를 개혁하여 강화하였으며, 의복 제도를 간편하게 고치고 사치를 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국가의 법치 질서를 확립하기 위하여 법전을 정비하여 대전회통을 편찬하였다.

나아가, 왕실의 위엄을 다시 세우고자, 임진왜란 때에 불타 버린 경복궁을 중건하여 근정전과 경회루 등을 오늘의 모습으로 갖추어 놓았다.

이와 같은 흥선 대원군의 개혁 정치는, 그 동안 쌓여 온 폐단을 제거하고, 국가 재정의 확보와 농민의 불만을 해소시켜 정치적 안정을 가져올 수 있었으나, 반면에 양반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그리고, 경복궁 중건 과정에서 그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원납전을 징수하고 당백전을 발행하여 국가 경제를 어렵게 하고, 농민을 부역에 동원하여 백성의 원성을 사기도 하였다.

양요

흥선 대원군은 서양 각국의 계속되는 통상 요구에 대하여, 이것을 침략의 위협으로 보고 이에 응하지 않았다.

이 때, 러시아 인들이 두만강 국경을 자주 넘나들며 위협을 가해 오자, 흥선 대원군은 국내에서 비밀리에 포교 중이던 프랑스 선교사를 통하여, 프랑스와 손을 잡고 러시아 세력을 막아 보려고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렇게 되자, 천주교에 대한 반대의 기운이 높아져, 결국 프랑스 선교사와 많은 천주교도들을 박해하였다.

프랑스는 이를 문제삼아 군함을 보내어 강화도에 침입하였다. 프랑스군이 강화성을 점령하고 한강 수로를 막아 서울은 한때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정족 산성을 공격하던 프랑스군이 양헌수 부대에 패하여 1개월 만에 물러감으로써 전투는 끝났다. 이는 우리 나라 안에서 서양 세력과 가진 최초의 전투였다. 이를 병인양요라 한다(1866). 프랑스군은 퇴각할 때 강화성에 불을 지르고 많은 서적과 보물을 약탈해 갔다.

그 후, 독일인 옵페르트가 흥선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무덤을 도굴하려다 달아난 사건이 일어나, 서양인을 배척하는 기운이 더욱 높아졌다. 이것은 흥선 대원군의 쇄국 정책을 강화하는 구실이 되었다.

한편, 이보다 앞서 미국 상선 제너럴 셔어먼 호가 통상을 목적으로 대동강에 들어와 소란을 피우다가 평양 군민들에 의하여 불태워진 일이 있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미국은 군함을 출동시켜 강화도를 침범해 왔다. 미국의 군함은 광성진 등을 공격하여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물러갔는데, 이를 신미양요라 한다(18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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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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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화비

두 차례에 걸친 양요에서 서양 세력을 물리친 흥선 대원군은 더욱 거세게 천주교를 탄압하고 쇄국을 강화하였다. 그는 서울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세워 침략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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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화비
척화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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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일찍 서양과 개항하여 새로운 국가 체제를 갖추고 통상을 요청해 오는 일본에 대해서도 배척하는 정책을 취했다.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인 일본도 서양인과 똑같은 오랑캐로 여겼던 것이다.

이러한 흥선 대원군의 대외 정책은 외세 침략의 위협을 느끼는 일반 국민들에게 큰 환영을 받고, 일시적으로는 성공하였다. 그러나, 세계 정세의 커다란 변화의 흐름을 바로 내다보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 나라가 서양의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는 시기를 그만큼 늦어지게 하였다.

흥선 대원군은 개혁 정치로 왕권을 확립하고 정치를 안정시키는 등 공을 세웠지만, 그로 인해 불만을 품게 된 유림 세력을 앞세운 민씨 일파의 반대 운동에 의하여 정권을 잡은 지 10년 만에 물러났다.

학습 정리

1. 흥선 대원군은 국가와 민족의 어려움을 자각하고, 왕권의 재확립을 꾀하고자 개혁 정치를 폈다.

2. 홍선 대원군은 서양 세력의 위협에 대하여 강력한 쇄국 정책을 취하였고, 천주교를 탄압하였다.

3. 흥선 대원군의 대외 정책은 서양의 침략을 막아 내려는 것이었으나, 서양 문물과의 접촉을 늦어지게 하였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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