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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Ⅲ. 일제 침략과 독립 투쟁
  • 1. 한말의 주권 수호 운동

1. 한말의 주권 수호 운동

〔학습 개요〕

러⋅일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일본은, 영국과 미국의 묵인하에 노골적으로 우리 나라에 대한 침략 정책을 펼쳤다. 먼저, 그들은 강압적으로 을사조약을 체결하여 우리의 외교권을 빼앗고 통감 정치를 실시하였다.

이러한 일제의 침략에 대항해서 우리의 주권을 수호하려는 투쟁을 맹렬하게 전개하였다. 고종 황제는 해외에 특사를 보내 열강의 도움을 요청하였으며, 애국 지사들의 의거가 잇달았다.

총칼을 들고 생명을 바쳐 나라를 지키려는 의병 투쟁과, 민족의 실력을 키워 주권을 다시 찾겠다는 애국 계몽 운동은, 그 방법은 다르나 민족의 주권을 수호한다는 목적에 있어서는 같은 민족 투쟁이었다.

학습 문제

1. 일제는 어떤 방법으로 우리의 주권을 탈취하였을까?

2. 우리 민족은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에 어떻게 대항하였을까?

3. 한말의 의병 투쟁과 애국 계몽 운동은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통감 정치

러⋅일 전쟁이 일어나자, 우리 나라는 중립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우리 나라 각 지역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한⋅일 의정서를 강제로 체결하여 군사상 필요한 장소를 마음대로 쓸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전쟁 물자를 실어 나르기 위해 경부선, 경의선을 부설하였다.

일제는 전세가 그들에게 유리해지자, 우리 정부에 제1차 한⋅일 협약을 강요하여 체결하고, 외국인 고문을 두어 우리 나라 내정을 간섭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고문 정치로서, 이 때부터 우리의 외교권은 상실되기 시작하였다.

일제는 러⋅일 전쟁에서 승리하자, 본격적으로 한국 침략을 단행하였다. 이들은 고종 황제와 내각이 분명히 거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무력으로 우리 정부를 위협하여 일방적으로 제2차 한⋅일 협약의 성립을 발표하였다. 이것이 을사조약이다. 이 조약에 따라 일제는 통감을 두어 우리 나라 정치 전반을 간섭하는 통감 정치를 실시하였는데, 초대 통감이 이토오 히로부미였다.

국민의 저항

침략적인 을사조약이 나라 안에 알려지자, 항일 저항 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다. 먼저 항쟁의 불씨를 던진 것은 언론계였다.

황성 신문은 이 조약이 일제의 무력에 의해 강압적으로 체결된 것을 폭로하고, 장지연의 ‘시일야 방성 대곡’이라는 논설을 실었다. 장지연은 이 글에서 일제의 침략을 공박하는 동시에, 당시의 매국 대신들을 격렬한 언사로 비난하였다. 결국, 황성 신문은 무기 정간을 당하였다. 제국 신문, 대한 매일 신보 등도 을사조약 반대 운동을 상세히 보도하여 민족 정신을 고취하고, 항일 운동을 불러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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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지연
장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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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전직 고관들과 유생들은 조약의 무효와 매국노의 규탄을 부르짖는 상소문을 올렸다. 이상설, 임병찬, 최익현 등이 상소 운동을 전개한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한편, 서울에 있는 상가가 철시를 하고, 학생들은 자진하여 휴학을 단행하였다.

그리고, 국운을 돌이킬 수 없음을 가슴아프게 여겨 자결로써 순국하는 사람도 나왔다. 영국 주재 대리 공사이던 이한응은 우리의 외교권이 흔들리고, 독립 국가의 외교관으로서 대우를 받지 못하게 되자, 조국 동포에게 피끓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특히, 민영환의 순국 항쟁은 온 국민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그는 매국노의 처단과 조약의 무효를 주장하는 2차에 걸친 상소가 아무런 성과를 보지 못하자, 고종 황제와 동포에게 보내는 유서를 쓰고 자결하였다. 민영환의 순국은 민족의 항일 운동을 격화시켜, 시민들이 집회를 열어 일제에 대항할 것을 결의하고, 이를 막는 일본 경찰과 충돌을 벌이기도 하였다. 이어, 조병세도 국민과 각국 공사에게 보내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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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환
민영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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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 국민에게 증오의 대상이 된 것은 일제와 함께 을사조약에 찬성, 서명한 매국 대신들이었다. 나철, 오기호 등은 5적 암살단을 조직하여 활동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헤이그 특사

국민들이 을사조약 반대 운동을 전개하고 있을 때, 고종 황제는 강압적으로 체결된 을사조약이 무효임을 대한 매일 신보를 통하여 선언하고, 러시아, 독일, 미국, 프랑스 등 네 나라에 공동 대책을 취해 줄 것을 요청하는 친서를 발표하여 일제의 침략을 규탄하였다.

그리고, 미국의 협력에 의하여 국난을 타개해 보려고 미국인 헐버어트를 황제의 특사로 워싱턴에 파견하였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한편, 고종 황제는 헤이그에서 열리는 제2회 만국 평화 회의에서 일제의 불법적인 침략을 호소하여 국제 여론을 불러일으키고자 이상설, 이준, 이위종 세 사람을 특사로 파견하였다(1907). 이들은 헤이그에 도착하자, 그들이 머무르는 집에 태극기를 내걸고 정식 외교 사절단으로 활약하였다. 영⋅미⋅프 등의 대표단에게 한⋅일 협약의 부당성을 밝히고, 만국 기자 협회에서도 일제의 야만적인 침략을 규탄하였다. 그러나, 외교권이 없다는 이유로 만국 평화 회의의 참석을 끝내 거부당하자, 이준 열사는 통분한 나머지 이국 땅에서 순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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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그 특사(좌)와 고종 황제의 신임장(우)
헤이그 특사(좌)와 고종 황제의 신임장(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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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 해산

헤이그 특사 사건을 구실로 일제는 그들의 침략 정책을 강력하게 반대해 온 고종 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침략을 더욱 노골화했다. 고종 황제의 퇴위에 대해 일반 민중들은 집회 또는 시위를 통해 격렬한 반대 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우세한 일본군의 무력 앞에는 어쩔 수 없었다.

일제는 곧 이어 한⋅일 신협약(정미 7조약)을 성립시키고, 우리 정부의 각 부 차관을 일본인으로 임명하는 이른바 차관 정치를 강요하였다. 이어서, 사법 분야와 경찰 분야에 일본인 관리를 다수 등용시켜 내정 간섭을 강화하였다.

한편, 일제는 한국에 대한 침략을 위해서, 한국의 재정이 어렵다는 구실을 붙여 국방의 임무를 맡고 있는 우리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켰다. 군대가 해산될 때, 한국군 시위대 대대장 박승환이 자결하는 것을 계기로 일본군과 시가전을 전개했으며, 원주, 강화, 충주, 진주의 진위대도 일어나 일본군과 항전하였다. 그 후, 이들은 각지에서 활약하고 있는 의병과 합류하여 더욱 거세게 주권 수호를 위한 투쟁을 펴 나갔다.

민족 교육

일제의 무력에 의한 침략이 계속되고 우리 나라의 주권이 침탈되어 가자, 민족 지도자들은 민족의 힘을 기르기 위한 개화 운동에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우리 나라의 지식층은 개항 후 서양의 근대 사상과 문화를 받아들여 개화에 힘쓰는 한편, 근대화를 위한 계몽에 노력해 왔다. 그러나, 보수 세력의 반대와 외국 세력의 간섭으로 근대화를 이루지 못한 채, 일제의 침략을 받아 나라의 주권이 위협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주권을 수호하기 위한 우리 민족의 투쟁은 크게 두 갈래를 이루었는데, 그 하나는 애국 계몽 운동이었고, 또 하나는 의병 항쟁이었다.

애국 계몽 운동은 주로 개화 지식인이 중심이 되어 전개되었는데, 이 운동은 단순한 계몽 운동이 아니라 주권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민족의 실력을 길러야 하겠다는 생각에서 전개된 하나의 민족 운동이었다.

이러한 운동의 대표적인 것은 교육 운동이었다. 우리 나라에 근대적 교육 활동이 시작된 것은 1880년대 중반 이후의 일이지만, 민족 교육 운동으로서 맹렬한 기세로 전개된 것은 1905년을 전후해서였다.

애국 지사들이 편 이러한 교육 운동은, 표면상으로는 근대적인 지식의 보급과 민중의 교화를 위한 교육 계몽 운동이었으나, 실제에 있어서는 기울어진 국운을 회복하려는 독립 운동으로서, 애국심의 앙양과 항일 의식 고취를 목적으로 한 운동이었다. 따라서, 나라에서 세운 학교보다는 개인이나 단체에서 세워 운영하는 사립 학교가 더 많았다. 또, 지방 곳곳에 있는 한문 서당이 학당, 의숙으로 개조되어 새로운 배움의 터전이 되었다.

이들 사립 학교에서는 우리의 국어와 국사를 가르쳐 민족 정신을 키우는 데 주력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이러한 사립 학교의 활동을 억제하기 위해 사립 학교령을 발표하여, 사립 학교의 설립과 교과서의 사용에 있어서 심한 간섭과 탄압을 하였다. 따라서, 애국적인 내용이 들어 있는 많은 교과서를 사용 금지시키거나 폐기하였으며, 심지어는 교과서 편찬에 한국인의 참여를 완전히 금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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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적 내용의 교과서
애국적 내용의 교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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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으로 여러 항일 교육 단체의 활약이 전개되었다. 여기에는 특히, 지방별 특색을 살리면서 조직된 서북 학회, 기호 흥학회, 교남 교육회, 호남 학회, 관동 학회 등의 단체가 있었고, 종교 단체인 기독교 청년회도 설립되었다. 이들 단체는 교육과 계몽을 통하여 일제 침략을 규탄하는 동시에, 우리의 힘을 길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양기탁, 안창호를 중심으로 하여 조직된 신민회는 정치뿐만 아니라 경제, 교육, 문화 전반에 걸친 계몽 운동을 폈다. 신민회는 외세 침략에 대항하여 민족의 자주 독립을 확립할 수 있도록 국민의 역량을 기르는 데에 목표를 두어, 학교와 공장을 세우며 문화 사업을 벌이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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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호
안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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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채 보상 운동

애국 계몽 운동이 전개됨과 동시에, 일제에 진 빚을 국민의 힘으로 갚아 국가 경제의 자주적 지위를 다지고 일본의 침략에 항거하자는 국채 보상 운동이 전개되었다.

국채 보상 운동은, 일제의 침략 과정에서 우리 나라가 일제의 강요에 의해 진 빚을 우리 국민의 힘으로 갚아 경제적으로 독립하자는 경제적 민족주의 운동으로, 일반 민중의 많은 호응을 얻어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다.

일제는, 실제로는 그들의 침략과 우리 나라에 살고 있는 일본인을 위해서 도로, 수도, 은행, 학교, 병원 등을 설치하면서, 우리 나라의 근대화를 위한 사업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그 비용을 우리 나라 정부가 일본 정부에서 꾸어다 쓰는 형식을 취하게 하였다.

이처럼 강제에 의해 진 빚을 갚자는 국채 보상회가 대구에서 조직된 데 이어, 이 운동은 각 지방으로 퍼져 나갔다. 많은 사람들이 담배와 술을 끊고, 부녀자들은 반지, 목걸이 등을 내어 앞장 서서 성금을 모았다.

이 운동은 비록 일제의 방해로 실패로 끝나고 말았지만, 나라를 구하려는 우리 민족의 강렬하고 자발적인 애국 정신을 발휘한 구국 운동으로서, 지역과 남녀의 구별이 없이 전개되었다.

의병

일제의 침략에 대항해서 총칼을 들고 집단으로 투쟁한 한말 의병의 항쟁은, 애국 계몽 운동과 함께 민족 운동의 커다란 줄기였다.

의병 운동은, 임진왜란 때의 의병 정신을 계승한다는 격문을 발표하면서 이미 을미사변 때부터 시작되었다. 한말 의병은 강렬한 위정 척사 정신을 이어받은 유생들을 중심으로 하여, 명성 황후의 시해와 단발령에 분격하여 일어났다. 전통 문화를 수호하고 명성 황후를 시해한 원수를 갚아 주권을 수호하려는 이러한 의병 운동에는 각지의 민중들이 합세하였는데, 유인석 부대는 한때 충북 충주성을 점령하기도 했다.

의병 운동은 을사조약의 강제 체결로 더욱 치열해졌다.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어 일제 침략이 우리의 주권마저 위협하게 되자, 이에 분개한 우리 민족은 유생들과 전직 관리들을 중심으로 범국민적인 의병 활동을 폈다.

민종식이 각지의 유생과 전직 관리를 중심으로 많은 농민의 호응을 받아 충남 홍성을 점령하였고, 그 후에도 꾸준히 대항전을 계속하였다. 전북 태인과 순창에서는 유림의 대표였던 최익현의 의병 부대가 크게 활약하였고, 경상도 방면에서는 평민 출신 의병장인 신돌석이 항일 투쟁을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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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의 궐기
의병의 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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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황제가 강제로 퇴위당하고, 군대가 해산되자, 의병활동의 양상이 달라졌다. 해산된 군인들이 의병에 가담하자, 의병 활동은 조직적으로 전개되었고, 무기도 많이 갖추어졌다. 그리하여, 각지에서 항일 투쟁을 벌이던 의병들은 연합 작전으로 서울 진공 작전을 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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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
의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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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각지의 의병 활동은 우세한 무기를 가진 일본군 때문에, 1908년을 고비로 국내에서의 활약이 점점 약해졌다. 이 때, 일부 의병은 새로운 활동 근거지를 찾아 만주와 연해주 지역으로 이동하여 그 곳에서 무장 독립 투쟁을 계속하였다.

이와 같은 의병 활동은, 이후 독립군 활동, 광복군의 독립 투쟁으로 이어졌으며, 이것은 우리 민족의 끈질긴 독립 정신의 한 표현이기도 하다.

의사

일제의 강압으로 조직적인 항일 구국 운동이 어려워지자, 침략의 원흉과 매국노를 제거하여 민족의 원한을 풀고 침략 세력을 막으려는 개인에 의한 의거가 국내외 각지에서 일어났다.

일본 정부의 추천으로 우리 나라에 외교 고문으로 와 있던 미국인 스티븐스가 일제의 한국 침략을 찬양하는 발언을 하자, 이에 격분한 전명운, 장인환은 미국에서 그를 사살하였다. 이 두 의사의 의거는 미국 내에서 산발적으로 행해지고 있던 조국의 주권 수호 운동의 전개에 큰 계기가 되었고, 미국인들의 한국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였다.

안중근 의사의 의거 역시 민족의 한을 통쾌하게 풀어 준 것이었다. 안중근 의사는 한때 황해도에서 교육 활동에 힘쓰면서 독립 운동을 하다가, 국외로 나가 의병을 조직하여, 두만강 일대의 국경 지방에서 일본군과 항쟁하고 있었다.

이 무렵, 한국 침략의 원흉인 이토오 히로부미가 대륙 침략의 야심을 품고 러시아의 대표와 담판하기 위해 하얼삔에 도착했을 때, 안중근은 그를 사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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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과 그의 글씨
안중근과 그의 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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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의 의거는 일제의 침략에 대한 우리 민족의 강렬한 독립 정신과 대한 남아의 기상을 보여 준 것으로, 이 의거로 일제의 침략상이 세계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국외에서 애국적인 의거가 계속되고 있을 때, 국내에서는 친일적인 인사에 대한 국민의 원성이 높아졌다.

먼저, 을사조약 이래 일제의 앞잡이 구실을 해 온 매국 친일파를 암살하려는 계획이 진행되었다. 일찌기 하와이에서 생활하던 이재명 의사는 귀국한 후, 동지들을 모아 이완용, 이용구의 암살을 시도하였으나, 부상을 입히는 것으로 그치고 말았다.

이와 같은 잇단 의거는, 일제의 침략에 대한 우리 민족의 애국 계몽 운동이나 의병 투쟁 같은 단체적인 구국 운동이 큰 성과를 보지 못하게 됨에 따라, 피끓는 애국 지사들에 의해 개인 투쟁으로 나타난 것이다.

독도와 간도

우리 나라의 외교권을 박탈한 일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독도를 강탈하고, 우리 땅인 간도를 청에 넘겨 주어, 우리 국토에 대한 국제 분쟁의 씨를 뿌려 놓았다.

독도는 울릉도에서 바라다보이는 거리에 위치한 울릉도에 부속된 섬으로, 울릉도가 신라 시대부터 우리 영토가 됨에 따라 독도도 우리 영토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조선 태종 때에 유민 방지를 위하여, 섬에 나가 살던 사람들을 본토로 옮겨 살게 하면서 울릉도의 관리가 소홀해졌고, 부속된 독도에 대한 관리도 자연 소홀해졌다. 그 후, 숙종 때 울릉도에 나갔던 안용복이 불법 침범한 일본 어부를 발견하여 그들을 축출한 후, 일본에 건너가서 우리 영토임을 재확인한 일도 있었다.

그러나, 일본 어민들은 몰래 울릉도의 목재를 벌채하고 어업 활동을 하는 등 이 곳을 자주 침범하였다. 1881년에는 울릉도 순찰에 나선 우리 나라 관리들이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되어 일본에 항의하는 한편, 울릉도에 이민을 장려하고 관청을 두어 독도까지 관할하게 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러⋅일 전쟁 중에 강제로 독도를 일본 영토에 편입시켰다. 독도는 광복과 더불어 우리 영토로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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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
독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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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간도는 본래 고구려, 발해의 땅으로, 옛날 우리 민족의 활동 무대였다. 뒤에 여진족이 청을 건국한 다음, 이 지역은 그들 조상의 발상지라 하여 다른 민족의 활동을 금하고, 숙종 때 우리 나라에 국경선을 확정짓기를 요청하여 마침내 백두산 정계비를 세웠다(1712).

이로써, 오래 전부터 우리 영토였던 간도는 이 정계비에 의해 우리 영토임이 더욱 확실해졌다. 뿐만 아니라 많은 우리 나라 사람들이 이 곳에 들어가 황무지를 개척하고 논을 만들어 경작하면서 정착하였다. 그런데, 고종 때 청이 간도를 그들의 영토라고 주장하여 이른바 간도 귀속 문제가 발생하였으나, 결론이 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서는 이 곳을 우리 영토로 간주하고, 관리를 파견하여 다스리면서 주권을 행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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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 개척과 우리 민족의 해외 이주
간도 개척과 우리 민족의 해외 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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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을사조약으로 우리 나라의 외교권을 빼앗은 일제가 만주 침략을 위한 남만주 철도의 잇권과 교환 조건으로 간도를 청의 소유로 인정하였던 것이다.

학습 정리

1.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제국주의 열강과의 교섭을 통하여 우리 나라를 국제적으로 고립시키는 한편, 적극적인 침략 정책을 폈다.

2. 일제의 침략을 막아 낼 수 없었던 것은 우리의 국력이 달렸기 때문이었으며, 마침내 우리 나라는 주권을 상실하였다.

3. 일제의 침략에 대한 주권 수호 투쟁은 국내외에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전개되었다.

4. 한말 의병 투쟁과 애국 계몽 운동은 각각 위정 척사 사상과 개화 사상을 이어받은 주권 수호의 민족 운동이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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