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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Ⅳ. 대한 민국의 성립과 발전
  • 1. 대한 민국 정부의 수립

1. 대한 민국 정부의 수립

〔학습 개요〕

국내외에서 줄기차게 펼쳐졌던 독립 운동과 연합군의 승리로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우리 나라는 광복을 맞게 되었다.

1910년,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이래 35년간의 압제에서 벗어나 다시 독립을 되찾을 수 있었던 것은 우리 민족의 끈질긴 독립 투쟁의 결과라고 하겠다.

그러나, 우리 나라는 정부 수립을 이루기까지 또 다른 시련을 겪지 않으면 안 되었다. 전체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협력했던 미⋅소 양국은, 전후에 민주⋅공산 양대 진영으로 갈라졌다. 그 날카로운 대립의 영향은 우리 땅에도 미쳐, 우리는 38도선으로 국토가 분단되는 비극을 겪어야 했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 우리는 민주 국가인 대한 민국 정부를 수립하였다.

학습 문제

1.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우리 민족이 독립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2. 38도선은 왜 생겼으며, 우리에게 어떠한 문제를 가져왔을까?

3. 대한 민국 정부는 어떠한 경로를 밟아 수립되었을까?

8⋅15 광복

일제의 무조건 항복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이 연합군의 승리로 끝나자, 그 동안 일제의 강점하에서 갖은 고초를 겪던 우리 민족은 감격어린 광복을 맞이하였다(1945).

그러나, 우리 민족의 광복은 연합군의 승리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중국, 미국, 영국 등 연합국의 후원과 약속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한 후원과 약속은 우리 민족의 그 동안의 피어린 독립 투쟁의 결과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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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의 기쁨
광복의 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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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서의 끈기 있는 독립 투쟁과 만주, 연해주 지역에서의 줄기찬 항일 무장 투쟁, 대한 민국 임시 정부의 계속적인 활동, 그리고 민족의 잇단 의거가 중국을 비롯한 세계 여러 나라의 인식과 후원을 받게 된 것이었다. 일찌기, 광복군은 대한 민국 임시 정부의 대일 선전 포고와 때를 같이하여 인도, 버어마 등지에서 연합군과 함께 일본군과 전투를 하였으며, 본토에 진입하기 위한 훈련을 받고 있었다. 특히, 중국은 중⋅일 전쟁 이후 적극적으로 우리의 독립 투쟁을 후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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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서하는 광복군
선서하는 광복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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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토의 분단

조국이 광복되던 날, 우리 겨레는 방방곡곡, 거리거리에 쏟아져 나와 숨겨 두었던 태극기를 흔들며 애국가와 대한 민국 만세를 목이 터져라 부르며 광복의 기쁨을 나누었다.

외국으로 망명을 떠났던 애국자들이 돌아오고, 일본 등지로 징용 나갔던 가족들이 한데 모일 수 있게 되었다. 이제 그렇게도 그리던 우리의 광복을 이룩하고, 우리 손으로 우리의 나라를 세울 수 있는 희망과 기쁨에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의 감격적인 광복은 바로 독립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미국과 소련의 군사적인 이해에 의해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하여, 미⋅소 양국의 군대가 우리 나라의 남과 북에 각각 주둔해서 군정을 실시하였기 때문이다.

처음, 미⋅소 양국에 의해 단순한 군사적 경계선으로 그어졌던 38도선이, 그 후 복잡한 세계사의 움직임에 따라 정치적 분할선으로 굳어지게 되어, 우리 민족은 국토 분단이라는 뜻밖의 시련을 안아야 했다. 이 시련은 아직까지 계속되고 있으며, 우리에게 통일이라는 큰 과제를 안겨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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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도선 표지
38도선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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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탁 통치 반대 운동

38도선을 경계로 남과 북에 진주한 미⋅소 양국군은 각기 군정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미군정하에서의 남한은 정국이 안정되지 못하였다. 그것은 많은 해외 동포들과 해외에서 망명 생활을 하면서 독립 투쟁을 펴 왔던 독립 투사들이 귀국하여, 서로의 주장이 통일되기가 어려웠으며, 공산당의 공작 활동이 심했기 때문이었다.

군정이 끝난 후에 정부를 수립할 것에 대비하여, 지도자들이 많은 정당을 만들었지만, 서로의 의견이 엇갈리고 정치적 훈련도 부족하였기 때문에, 정치적 활동의 기반이 좀처럼 잡히지 않았다.

한편, 소련 군정하의 북한에서는, 소련의 조종을 받는 공산주의자들이 급속하게 자라나, 민족의 소망을 무시한 채 뒷날 공산 독재 정치를 밀고 나갈 기초 작업을 하고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모스크바에서 열린 미⋅영⋅소 3국 외상 회의에서, 우리 나라를 상당한 기간 동안 미국, 영국, 중국, 소련의 네 나라가 신탁 통치를 실시한 후에 독립시킨다는 신탁 통치안을 결정하였다(1945).

이 신탁 통치안은, 우리 나라에 더 머물러 있으면서 그 사이에 공산주의 세력을 넓혀 보겠다는 소련의 음흉한 야욕이 크게 작용한 것이었다.

국제적인 신의를 저버리고 우리의 역사와 전통을 무시한 채, 우리 민족이 염원하는 독립을 지연시키려는 신탁 통치안이 국내에 전해지자, 우리 민족은 맹렬한 반탁 운동을 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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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탁 운동
반탁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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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공산주의 세력을 넓히는 데만 목적을 둔 소련의 지시를 받은 국내의 공산주의자들은, 민족과 조국의 독립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신탁 통치를 찬성하고 나섰다. 이와 같은 공산주의자들의 흉계와 배신에 국민들은 분노를 금할 수 없었다.

미⋅소 공동 위원회

신탁 통치안에 대한 우리 민족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신탁 통치에 대한 구체적인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서울에서 미⋅소 공동 위원회가 열렸다. 그러나, 미국과 소련의 의견이 서로 일치되지 않아 제2차 위원회까지 열렸으나, 결국 결렬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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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소 공동 위원회
미⋅소 공동 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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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우리 나라의 정부 수립을 위한 협의에 우리 나라의 정당, 사회 단체 대표를 참석시키는 문제에서, 미국측은 모든 정당, 사회 단체의 참석을 주장하였으나, 소련측은 신탁 통치안을 찬성한 공산주의 계통의 단체만 참석시키기를 고집하였다. 이것은 앞으로 우리 나라에 공산주의 세력을 뿌리박으려는 소련의 속셈을 폭로한 것으로서, 이제 우리 나라의 독립 문제는 미⋅소 두 나라의 협의로는 해결되기가 어렵다는 것이 밝혀졌다. 또, 공산주의의 속셈이 무엇인지도 많은 사람이 알게 되었다.

대한 민국

미⋅소 양국의 교섭을 통하여 한국의 독립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열렸던 미⋅소 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미국은 한국 문제를 국제 무대에서 해결하고자 유우엔에 제출하였다(1947).

유우엔 총회에서는 한국 문제를 논의한 끝에, 유우엔의 감시하에 한반도에서 총선거를 실시하여 통일 정부를 수립하기로 결의하였고, 이어 이 일을 맡아 볼 유우엔 한국 위원단을 한반도로 파견하였다.

그러나, 소련과 북한 공산 집단은 유우엔 한국 위원단이 북한에서 그 임무를 수행할 수 없도록 방해하였다. 이것은 총선거를 실시할 경우, 공산주의가 우리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할 것을 소련과 북한 공산 집단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유우엔 소총회에서는, 선거가 가능한 지역에서만 총선거를 실시하여 정부를 수립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에 따라, 역사적인 총선거가 실시되었으나(1948. 5. 10.), 북한 공산 집단은 이러한 민족적 염원을 끝내 외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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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0 총선거 모습
5⋅10 총선거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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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거를 실시한 후, 국회를 구성하고 국회에서 헌법을 제정하였다. 헌법에 따라 국회에서 이승만을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하고, 이어서 8월 15일 광복 기념일을 맞이하여 민주 공화국으로서의 대한 민국 정부의 수립을 내외에 선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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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수립 선포식
정부 수립 선포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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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민국은 우리 역사상 우리 국토에 우리 민족의 손으로 세운 최초의 민주 공화국이다. 일제의 침략으로 나라를 잃은 후, 이제 전 민족이 염원하던 우리의 정부를 수립한 것이었다.

학습 정리

1. 8⋅15 광복은, 우리 민족의 줄기찬 독립 투쟁과 연합국의 승리의 결과로 찾은 것이다.

2. 신탁 통치안은 독립을 염원하는 우리 민족의 뜻을 외면하고 자주 독립의 역량을 무시한 것이다.

3. 대한 민국 정부의 수립은 3⋅1 운동의 독립 정신을 계승한 우리 민족의 정통성을 잇는 역사적 의의를 가지고 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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