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대 국사 교과서
  • 5차 교육과정
  • 중학교 국사 5차(상)
  • Ⅴ. 조선 사회의 발전
  • 3. 경제 생활과 민생의 안정

3. 경제 생활과 민생의 안정

〔학습 개요〕

조선은 국가를 부강하게 하고, 민생을 안정시키는 데 주력하였다. 그리하여 농업을 주요 산업으로 삼고, 농업 생산을 높이기 위하여 농업 서적을 간행하고, 수리 시설을 확충했으며, 농업 기술을 혁신하였다. 그 결과, 농산물의 생산이 늘어났고, 농민의 생활도 향상되어 민생의 안정을 가져왔다.

농산물과 수공업품의 교역을 위한 시전과 장시가 있었으나, 상공업은 농업에 비하여 그다지 큰 발전을 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서울과 전국의 교통 요지에는 인구가 늘어나 도시 규모가 커져 갔고, 점차 상거래가 활발해져 갔다.

학습 문제

1. 조선 왕조는 민생의 안정을 위하여 어떠한 경제 시책을 폈는가?

2. 조선 초기의 토지 제도는 어떻게 변하였는가?

3. 농업의 발전상은 어떠하였으며, 국가에서 상공업을 규제한 이유는 무엇인가?

4. 국가의 재정 기반은 무엇이었으며, 국가에 대한 농민의 부담은 어떠하였는가?

농본 정책과 토지 제도

농본 정책을 내세운 조선 사회에서는 농업을 국가 경제의 기본으로 하였다. 적전을 두어 국왕도 농사일에 모범을 보였고, 왕후 또한 친잠소에서 누에를 치는 모범을 보였다.

확대보기
양잠하는 모습
양잠하는 모습
팝업창 닫기
확대보기
선농단(임금이 그 해의 농사가 잘 되기를 제사지내던 곳. 서울 용두동 소재)
선농단(임금이 그 해의 농사가 잘 되기를 제사지내던 곳. 서울 용두동 소재)
팝업창 닫기

농업 생산력을 높이기 위하여 국가에서는 농사직설과 같은 농업 서적을 간행하였고, 책력을 만들어 농사일에 대한 정보를 농민에게 제공하였다. 세종 때에 제작한 측우기도 농사에 도움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농사짓는 계절에는 부역을 금하여 오로지 농사일에만 전념하도록 하였다.

한편, 전국의 토지를 파악하고 관리하기 위하여, 토지 대장을 만들어 국가 기관에 보관하였다. 토지 대장은 토지의 소유주와 경작자, 그리고 위치와 넓이 등이 기록된 기본 문서로서, 조세를 부과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이용되었다.

조선의 토지 제도는 고려 말에 제정된 과전법을 기초로 하였다. 관리들은 과전법에 의해 국가로부터 토지를 지급받았으며, 그 토지는 농민들에 의하여 경작되었다. 관리들에게 지급한 과전은 원칙적으로 1대에 한하였다.

그러나 과전 중의 일부가 수신전, 휼양전이라는 이름으로 공신전과 마찬가지로 세습되기도 하였으므로, 시간이 흐름에 따라 관리에게 지급할 토지가 부족하였다. 그리하여 세조 때에는 현직 관리에게만 토지를 지급하는 직전법을 실시하였으며, 성종 때에는 국가가 직접 농민으로부터 조를 거두어 관리에게 주는 관수 관급제를 실시하였다.

농업과 상공업

국가에서는 농업 정책에 의해 경지 면적을 늘리고, 저수지, 보 등의 수리 시설을 확충하는 한편, 종자의 개량과 농업 기술의 개발에 힘썼다. 그리하여 건국 초에 약 100만 결 정도에 지나지 않던 농지가 세종 때에는 약 160만 결로 늘어났고, 남부 지방의 일부에서는 모내기법과 벼, 보리의 2모작도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국가에서는 양봉, 양잠을 권장하고, 과수, 약초, 목화 등 특수 작물의 재배를 장려하였다. 특히, 목화의 재배가 여러 지역으로 확대되자, 일반 국민들의 의생활은 크게 향상되어 갔다. 그뿐만 아니라, 국가는 의창, 상평창 제도를 마련하여 농민들의 생활을 도우니, 민생은 점차 안정되어 갔다.

한편, 상공업은 농업을 중시하고 상공업을 천시하는 유교적 직업관과 국가의 통제로 크게 발전하지는 못하였다. 서울에서는 시전 상인이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물품을 납품하면서 정부의 보호 아래 상업 활동을 폈다. 그 중에서도 비단, 무명, 명주, 종이 등을 취급하는 육의전이 가장 번성하였다.

확대보기
옛날의 종로 거리
옛날의 종로 거리
팝업창 닫기

일부 지방에서는 점차 장시가 열려 농산물과 수공업 제품이 매매되었다. 장시는 대체로 5일장으로 되었는데, 이 곳에서는 보부상들의 활약이 컸다. 교역의 매개가 된 것은 주로 쌀과 포목이었다. 한편, 국가에서는 화폐를 만들어 이를 유통시키려고 몇 차례 시도하였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수공업은 관영 수공업을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즉, 수공업자인 장인은 중앙과 지방의 관청에 소속되어, 그 곳에서 국가가 필요로 하는 물품을 만들어 공급하였다. 장인은 자기의 책임량 이외의 생산품은 일정한 세를 낸 후에 자유롭게 판매하여 이득을 얻을 수가 있었다.

농촌의 수공업은 주로 직물을 짜는 가내 수공업이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가내 수공업은 자급 자족의 형태를 띠고 발달하였는데, 대표적인 생산품은 삼베, 무명 등의 옷감과 농기구, 죽제품 등이었다.

국가 재정과 농민의 부담

국가의 재정은 조세, 역, 공납이 그 기본이었다. 이를 주로 부담하는 것은 양인이었다.

조세는 농토에 대한 토지세로서, 농민들이 곡식을 현물로 납부하는 것이다. 조선 초기에는 조세를 공정하게 부과하기 위하여, 풍년과 흉년을 기준으로 한 연분 9등법과 토지의 비옥한 것과 메마른 것을 기준으로 한 전분 6등법을 실시하였다.

연분 9등법

상상년-20 두   중상년-14 두   하상년-8 두

상중년-18 두   중중년-12 두   하중년-6 두

상하년-16 두   중하년-10 두   하하년-4 두

역은 나라의 토목 공사에 동원되는 요역과 국방을 맡는 군역의 두 가지가 있는데, 농민에게는 모두 큰 부담이 되었다.

역의 대상은 16세에서 60세까지의 정남이었고, 공정한 역의 시행을 위해서는 정확한 호구의 파악이 필요하였다. 따라서, 국초부터 호적을 마련하기 위한 호구 조사 사업을 거듭하였는데, 호패 제도나 오가작통법 등은 모두 정확한 역의 시행을 위한 제도였다.

확대보기
호패
호패
팝업창 닫기

공납은 각 지방의 특산물을 중앙으로 납부하는 제도였다. 공납은 현물로 바쳐야 하기 때문에, 수납, 운반, 보관에 많은 어려움이 뒤따랐다. 그 종류도 곡물, 해산물 등 생활에 필요한 품목이 거의 포함되어 있어, 농민들에게는 큰 고통과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한편, 15세기 말에 이르러 일부 양반 관료들이 권력을 바탕으로 공신전, 별사전 등을 지급받아 넓은 토지를 차지하였다. 이리하여 농장이 발달하였다.

농장의 확대는 자연히 과전의 부족을 초래하였을 뿐만 아니라, 면세, 면역 등으로 국가 재정의 수입을 감축시켰고, 농민의 생활을 더욱 궁핍하게 만들었다.

◇ 학습 정리 ◇

1. 조선은 민생의 안정과 국가의 부강을 위하여 힘썼으며, 농본 정책을 추진하여 농업을 국가 경제의 기본으로 삼았다.

2. 건국 초기에는 과전법이 시행되었으나, 세조 때에 직전법으로 바뀌어져 토지에 대한 국가의 지배력이 강화되었다.

3. 조선 초기에는 농지 면적이 늘어나고, 농사 기술이 향상됨에 따라 농업 생산이 크게 증가하였다.

4. 상업과 수공업은 유교적 직업관에 의해 천시되었고, 국가의 규제를 받아 자유로운 발전이 어려웠다.

5. 국가의 재정은 양인들이 부담하는 조세, 역, 공납이 그 기본을 이루었으며, 농민들이 국가 재정의 거의 전부를 부담하였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