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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차 교육과정
  • 중학교 국사 5차(하)
  • Ⅰ. 조선 사회의 새로운 움직임
  • 1. 제도의 개혁과 정치의 변화

1. 제도의 개혁과 정치의 변화

〔학습 개요〕

16세기 중엽 이래 계속되어 온 양반 사회의 동요는 왜란과 호란을 계기로 한층 더 심해 갔다. 당시의 통치자들은, 급박한 상황에 처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하여 조세를 가볍게 하고, 농민에게 큰 부담을 주었던 공납과 군역의 제도를 개혁하였다.

그러나 이들 제도의 개혁이 근본적인 것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정치는 다시금 어지러워졌고, 이후 세도 정치가 시작되면서부터 양반 사회는 급속도로 무너져 갔다.

학습 문제

1. 대동법의 실시는 국민 생활과 국가 재정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가?

2. 균역법 실시의 배경과 그 결과는 어떠하였는가?

3. 왜란과 호란을 겪은 후, 군사 제도는 어떻게 개편되었는가?

4. 영⋅정조 때의 중흥을 위한 노력은 어떠하였는가?

사회 변화의 움직임

조선 중기 이후에 왕권이 약해지고, 정치의 실권이 양반 관료에게 넘어가면서 조선 사회는 날로 보수화되어 갔다.

양반 관료들은 정치적 실권을 바탕으로 하여 사회⋅경제적 특권을 누리면서, 농민에게 무거운 부담을 안겨 주었다. 이러한 상황은, 두 차례의 전쟁을 겪고서도 변함이 없었다. 이에 농민들은, 정부에 대하여 더 이상 기대할 수 없게 되자, 스스로의 노력으로 살 길을 모색하게 되었다.

양반들의 정치 싸움은 백성들의 생활 문제와는 거리가 먼 것들이었다. 그리하여 농민들은 정부의 시책에 잘 따르지 않았으며, 나라의 부역 노동에 대해서도 이를 기피하는 경향이 뚜렷해졌다. 정부에서는 이로 인한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하여 대동법, 균역법 등 새로운 정책을 실시하였다.

대동법 실시

장기간에 걸친 전란으로 국토는 황폐해졌을 뿐만 아니라, 경작지도 줄어들었다. 또, 국가 기강이 문란해진 틈을 타서 일부 벼슬아치들이 부정 행위를 저질러 국가 수입은 줄어들었고, 국민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졌다.

이에, 정부에서는 새로 농토를 개간하고, 버려졌던 농토에 다시 농사를 짓게 하여 경작지를 넓히는 한편, 토지를 측량하고 토지 대장을 새로 만들어 농토를 파악하는 데 힘썼다. 또, 전세율을 낮추어 농민의 부담을 줄여 주기도 하였지만, 이는 국가 수입을 늘리기 위한 것이기도 하였다.

여러 가지 제도의 개혁 중에서도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대동법의 실시였다. 대동법은, 국민에게 큰 부담과 괴로움을 주었던 공납을 현물 대신 대동미라고 하여 쌀로 바치게 하는 제도였다.

지방 토산물로 바치는 공물 세납은 납입, 운반, 보관 등에 어려움이 있었을 뿐 아니라, 관리들의 부정이 끼여들기 쉬워 큰 문제를 안고 있었다.

대동법은 왜란 직후, 이원익의 건의에 따라 우선 경기도에 시행하였다. 대동법의 시행이 바람직한 것으로 밝혀지자, 숙종 때에는 평안도, 함경도를 제외한 전국에 확대, 실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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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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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법의 실시로 국가의 수입이 늘어나고, 농민의 생활도 어느 정도 안정되어 갔다. 그리고 상품 교환 경제의 발전을 돕는 등 당시의 사회 경제 발전에 새로운 자극을 주었다. 그러나 그 후, 이 법을 운영하는 과정에서 관리들이 부정을 함으로써 폐단이 나타나게 되어, 농민들의 생활은 다시금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균역법 실시

농민들이 특히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군역의 문제였다. 조선 사회에서 양인은 장정이 되면 군역의 의무를 져야 했다. 그러나 16세기 이후에는 군역 의무자가 현역에 복무하지 않는 대신에 군포를 바쳤는데, 군포는 장정 한 사람당 1년에 2필씩이었다.

그 후, 국가의 기강이 문란해지면서 군포를 내지 않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되고, 그 사람의 몫은 다른 농민들이 떠맡아야 했다. 또, 일부의 관리들은 군포를 징수하는 과정에서 부정을 저지르기도 하였다. 이에, 영조 때에는 그와 같은 폐단을 고치기 위하여 균역법을 실시하였다.

균역법은 군포를 1년에 1필로 줄여 농민의 부담을 덜어주고, 군포를 내지 않던 일부의 사람들에게도 부담시켰다. 그리고 종래의 권세가와 왕실에서 받아 오던 어장세, 염세, 선박세를 국가가 받아들임으로써 재정을 보충하였다.

균역법의 실시로 국민의 부담은 어느 정도 가벼워졌으나, 관리들의 부정이 그치지 않아 역시 많은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었다.

군제 개혁

왜란과 호란을 겪는 과정에서 국방력이 허술했다는 점이 드러났으므로, 국방에 대한 관심이 새로이 높아졌다. 그리하여 국방력을 강화하고자 국초부터 실시해 오던 5위 제도를 개혁하여, 훈련도감을 비롯한 5군영을 설치하였다.

5군영은 서울 근교에 설치되어, 수도 방위의 임무를 맡고 있었다. 특히, 훈련도감은 왜란 중에 설치한 군사 훈련 기관으로서, 포수, 사수, 살수의 삼수병을 훈련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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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어장대(남한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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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더불어 정부는 비변사의 기능을 강화하였다. 비변사의 권한이 강화되면서부터 행정의 최고 기관이었던 의정부의 기능은 크게 약화되었다. 비변사는 원래 비상시의 군사 행정을 맡기 위하여 군사 문제에 밝은 관리들로 구성되었던 특수 기관이었는데, 조선 후기에는 일반 행정까지 맡아 보는 국가의 최고 기관으로 변하였다.

이와 같이, 최고 행정 기관인 의정부의 기능이 약화되고 특수 기관인 비변사의 기능이 강화된 것은, 조선 후기 사회의 변화 중에서 주목할 만한 것이다.

붕당 정치의 전개

정치가 잘 행해지지 못하면서 여러 가지 폐단이 드러나고, 농민들의 불만이 커 가는 가운데 정부에서는 제도의 개혁으로 그러한 위기를 극복하려 하였으나, 이는 근본적인 대책이 되지는 못하였다. 한편, 16세기 말 이래로 붕당을 조성하여 정치를 이끌던 집권 양반들은, 17세기에 이르러서는 병권까지 장악하여 권력의 기반을 굳혀 갔다.

초기의 붕당 정치는, 여론을 앞세워 정치를 공정하게 하고자 하여, 건전한 정치 풍토를 조성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붕당 사이에 점차 정치적 대립이 심해지면서, 정치 기강이 문란해지고 왕권은 약화되어 갔다.

탕평책의 실시

정치 기강이 무너지고 왕권이 약해지자, 영조, 정조 때에는 흐트러진 정치 질서를 확립하려는 노력이 여러 모로 전개되었다.

즉, 영조는 붕당 정치가 잘못된 방향으로 나가자, 그 폐단을 막기 위해서 탕평책을 썼다. 탕평책의 실시로 왕권이 강화되자, 이어서 국가 재정을 안정시키고 국민 생활의 어려움을 덜어 주기 위하여 균역법을 실시하였다. 균역법이 시행되면서 어느 정도 군역의 폐단이 줄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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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평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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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영조는 지나친 형벌이나 가혹한 악형을 금지시키고, 신문고 제도를 부활시켜 국민들이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하였다. 그리고 속대전, 동국문헌비고 등을 편찬하여 문물 제도를 정비하였다.

정조도 영조의 왕권 강화 정책을 계승, 발전시켜 여러 가지의 치적을 남겼다. 규장각을 설치하여 학술 활동을 진흥시키는 한편, 대전통편, 규장전운 등 많은 책을 간행하였고, 형벌 제도도 개선하였다. 또, 농업을 진흥시키기 위하여 송금절목과 제언절목을 제정하여 산림과 제방을 보호, 관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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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장각 현판
규장각 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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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와 같은 영조와 정조의 시책은 통치 체제를 강화하기 위한 것으로서, 근본적으로 사회⋅경제적 폐단을 시정하는 데에는 미흡하였다.

〔학습의 도움 글〕

실학자 이익이 본 붕당 정치

영조 때의 실학자 이익(1681~1763)은 정치적 실권을 잃은 남인에 속한 인물로서, 개인적으로 붕당의 폐해를 뼈저리게 느꼈던 사람이다. 따라서, 그의 붕당관은 대단히 비판적이고 부정적이었다. 그러나 그가 본 붕당은, 반대당의 존재와 상호 비판을 인정하면서 전개되는 본래의 붕당 정치가 아니라, 이미 그 폐단이 심각한 단계에 접어든 일당 전제 정치의 운영에 대한 비판을 근거로 한 것이었다.

다음의 붕당론은 그를 비롯한 실학자들의 붕당에 대한 생각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붕당론

붕당은 싸움에서 생기고, 싸움은 이해 관계에서 생긴다. 이해 관계가 절실하면 붕당이 깊어지고, 이해 관계가 오래 될수록 붕당이 견고해지는 것은 당연한 형세이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지금, 열 사람이 함께 굶주리고 있는데, 한 그릇의 밥을 같이 먹게 되면 그 밥을 다 먹기도 전에 싸움이 일어날 것이다. …(중략)… 조정의 붕당도 어찌 이와 다를 것이 있겠는가? …(중략)… 대개 과거 제도가 번잡하여 인재를 너무 많이 뽑으며, 애증에 치우쳐서 진퇴가 일정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중략)… 이 밖에도 벼슬길이 분분하게 많으니, 이것이 이른바 관직은 적은데 과거에 응시한 사람은 많아서 모두 조처할 수 없다는 것이다. …(중략)… 당파가 생긴 뒤로는 아무리 총명하여도 제대로 판단하기 어렵다. 중립을 지켜 시비를 가리는 자를 용렬하다고 하고, 붕당을 위해 죽어도 굽히지 않는 자를 절개가 뛰어나다고 한다. 또, 영예와 치욕이 갑자기 뒤바뀌니, 사람들이 어찌 붕당을 만들어 싸우지 않겠는가?

◇ 학습 정리 ◇

1. 왜란 이후 정부는, 국가 재정 수입을 늘리고, 농민 생활의 어려움을 덜어 주기 위하여 대동법과 균역법을 실시하였다.

2. 대동법의 실시는 상품 교환 경제의 발전에 도움을 주었고, 민생의 안정에도 다소나마 기여하였다.

3. 균역법의 실시로 군포 징수의 폐단이 시정되고, 농민의 부담이 어느 정도 줄어들었으나, 관리들의 부정으로 다시 폐단이 생겨나 농민의 부담은 무거워졌다.

4. 왜란과 호란을 겪은 후, 정부는 국방력 강화를 위해 종래의 5위 제도를 폐지하고, 새로이 훈련도감을 비롯한 5군영을 설치하였다.

5. 영조와 정조는 정치 질서를 바로잡고, 국가 재정과 민생의 안정을 도모하였으며, 문물 제도를 정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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