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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사회 동요와 종교의 새 기운

〔학습 개요〕

19세기에 들어서서, 순조 이후 60여 년 동안 이른바 세도 정치가 행해졌다. 세도 정치로 인하여 조선 사회는 다시 큰 혼란을 겪게 되었다. 삼정의 문란으로 농촌 사회는 몹시 고통을 받았고, 부패한 세도 정치에 반발하는 민란이 자주 일어났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인간의 평등을 내세운 천주교와 동학이 농촌 사회와 서민층에 급속히 전파되었으나, 집권층으로부터의 박해를 피할 수 없었다.

학습 문제

1. 세도 정치로 인한 정치, 경제, 사회의 혼란은 어떠하였는가?

2. 조선 후기에 농촌 사회에서 민란이 자주 일어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3. 천주교가 수용되는 과정에서의 특징은 무엇인가?

4. 천주교는 왜 박해를 받았으며, 교세는 어떻게 확대되어 갔는가?

5. 동학의 발생 배경과 종교적 성격은 무엇인가?

신분제의 변화

조선 전기에는 양반, 중인, 상민, 천민의 네 신분이 형성되어 있었다. 양반의 사회적 지위와 특권이 강화되면서, 조선 사회는 양반 중심의 사회로 굳어져 가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는 신분 구조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국가에서는 궁핍한 재정을 메우기 위하여 납속책을 시행하고 공명첩을 남발함으로써 양반의 수가 증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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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명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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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붕당 간의 정치적 대립이 심해지면서 몰락하는 양반들이 많아졌다. 농업과 상공업이 발달하면서 부유한 상민이 양반의 신분을 얻거나, 양반이 상민이 되고, 천민이 상민이 되는 경우가 있었으며, 상민이 노비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하여 조선 후기에는 양반의 인구가 점차 늘어나고, 상민과 노비의 인구가 줄어드는 경향을 보였다.

국가는 상민이 줄어들고 양반이 늘어나는 것이 재정상으로도 불리하고, 국방상으로도 지장을 주기 때문에, 노비를 서서히 풀어 주는 정책을 취하였다. 사노비도 옛날처럼 상전에게 강하게 예속되지는 않았고, 상민과의 결혼도 자주 이루어져 그들의 사회적 신분이 나아졌다.

이와 같이 18, 19세기의 조선 사회에서는 양반 중심의 신분제가 크게 동요되어, 신분 간의 상하 이동이 활발해졌다. 그리하여 종래의 신분적 예속 관계는 크게 힘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세도 정치

신분제의 동요는 양반 중심 사회에 커다란 위기를 가져왔다. 게다가, 지배층과 농민의 갈등은 깊어지기만 하였다. 세도 정치가 시작되면서 탐관 오리의 횡포는 보다 심해졌다.

세도 정치란, 특정한 인물이 국왕의 신임을 얻어 국정을 맡아 왕권을 대행하는 비정상적인 정치를 말한다. 순조 때에는 김조순을 중심으로 한 안동 김씨가 세도를 잡았고, 헌종 때에는 풍양 조씨가 세도를 잡았으나, 철종 때에는 다시 안동 김씨가 세도를 잡았다. 이리하여, 3대 60여 년 간 외척에 의한 세도 정치가 이루어졌다.

세도 정치하에서의 세도가는, 국민의 이익보다는 자신의 세도를 유지하는 데 힘썼으므로, 인사 행정이 바르지 못하고 국가 기강이 문란해져서, 관료들은 사리 사욕을 채우기에 바빴다. 이로 인하여 삼정은 점차 문란해져 갔다.

삼정이란, 국가 재정 수입의 근본이 되는 전정, 군정, 환곡을 말한다. 전정은 토지에서 받아들이는 전세, 대동미 및 그 밖의 여러 가지 세를 뜻하며, 군정은 양인 정남이 바치는 군포를 말한다. 그리고 환곡은 관곡을 봄에 농가에 뀌어 주었다가 가을에 거둬들일 때에 약간의 이자를 붙여서 받는 것을 말한다.

지방 관리들은 이와 같은 삼정을 운영하면서 온갖 부당한 수단으로 사리 사욕만을 추구하였다. 이로 인하여 국민들의 고통은 심해졌고, 국고의 수입도 크게 줄어들었다. 따라서, 정부에서는 이러한 부정을 바로잡기 위하여 암행 어사를 지방에 파견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가난에 시달리고 빚에 몰린 농민들은 파산하여 농촌을 떠나는 경우가 많았다. 그들은 떠돌아다니며 걸식하거나, 세금을 물지 않는 산간 벽지로 들어가 화전민이 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이 부담해야 할 세는 친척이나 동리 사람들에게 돌아감으로써 남아 있는 농민의 부담은 더욱 무거워졌다. 그 위에, 헌종, 철종 때에는 흉년이 거듭 들고 전염병이 거듭 돌아, 농촌 사회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농민의 저항

궁지에 몰린 농민들은 이와 같은 상황 아래에서 새로운 살 길을 찾아야 했다. 농민들은 지배층의 횡포에 대하여 처음에는 감히 맞서지 못했지만, 점차 의식이 성장하면서 지배층과 정면으로 대결하고자 하였다. 마침내 홍경래의 난을 비롯하여 각지에서 이른바 민란이 일어났다. 민란에는 농민만이 아니라, 세도 정치에 불만을 품은 몰락 양반들도 가담하였다.

홍경래의 난은, 그릇된 세도 정치에 시달리던 농민들과 국초부터 부당한 차별 대우에 불평을 품어 오던 서북 지방민 세력을 기반으로 하여, 몰락한 양반인 홍경래 등이 평안도에서 일으킨 난이다. 난군은 한때 청천강 이북의 여러 고을을 지배하였으나, 정주성 싸움에서 패하여 마침내 진압되었다(1811).

홍경래의 난이 농촌 사회에 미친 영향은 컸다. 즉, 세도 정치 아래에서 시달리던 농민과 몰락한 양반들을 크게 깨우쳐 주었다.

농민의 동요는 철종 때에 와서 가장 심하였다. 즉, 진주 민란을 계기로 삼남 지방에서는 물론, 북으로는 함흥, 남으로는 제주도에까지 민란이 확대되었다. 이러한 농민의 항거는, 농민의 단순한 반발이었다기보다는 당시의 정치적 문란과 경제적, 사회적 불만을 해소하기 위한 농민의 자각 운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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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의 민란
19세기의 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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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의 수용과 박해

고통에 시달리던 농민들은 나름대로 살 길을 모색하는 한편, 정신적으로 위안을 받기 위하여 천주교, 동학 등 새로운 종교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우리 나라의 천주교 신앙은 선교사들에 의해 전래된 것이 아니라, 오랜 동안에 걸친 학문적 연구를 통해 자발적으로 수용된 것이었다.

일찍이, 이익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하여 서학이 연구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이벽 등은 신앙의 차원에서 천주교를 믿기 시작하였다. 그 후, 이승훈이 청에서 교인이 되어 돌아온 후로 마침내 교회가 창설되었다.

초기의 교회는 학식을 가진 양반이나 중인들이 주축을 이루었고, 신앙 활동은 서울, 내포, 전주 등을 중심으로 하여 전개되었다. 그 후, 교인들의 노력에 의하여 교세는 점차 농촌 사회와 서민층으로 뻗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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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의 비밀 종교 집회
천주교의 비밀 종교 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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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천주교의 인간 평등과 내세 사상은, 유교적 입장에서 보면, 당시의 사회 질서와 예속 생활을 근본적으로 그르칠 수 있는 위험스러운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리하여 천주교는 정부로부터 박해를 받게 되었고, 19세기에 들어와 몇 차례에 걸친 큰 박해로 많은 신자와 우리 나라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 등이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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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두산 순교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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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와 같은 계속적인 박해에도 불구하고, 정치의 부패와 사회의 불안으로 인해 천주교는 서민들 사이에 널리 전파되어, 그 교세가 크게 늘어났다.

동학의 발생

사회가 혼란하고 민심이 불안한 가운데, 당시의 종교는 그 구실을 다하지 못하였다. 불교는 산 중에 머물러 사회와 유리되어 있었고, 유교도 농민과는 거리가 멀었다. 또, 새로이 전래된 천주교는 서양에서 들어온 종교이기 때문에 생소하기도 하였거니와, 서양의 것이라 하여 경계하는 사람이 많았다.

이러한 때에, 최제우는 전통적인 민간 신앙과 유교, 불교, 도교를 토대로 하여, 인내천의 가르침과 인간의 평등을 주장하는 동학을 창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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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제우
최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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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은 외세의 침략적 접근과 천주교의 유포가 우리의 것을 그르치고 우리 사회를 위험하게 한다는 믿음에서, 우리의 것을 지키고 인간에게 구원을 주고자 한 것이었다. 따라서, 동학은 단순한 신앙 운동만이 아니라, 어지러운 정치와 어두운 사회를 바로잡고, 어려운 국민 생활을 구제하려는 사회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동학은 경주 지방에서 발생하여 농촌 사회로 급속히 퍼져, 그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이에, 당시의 집권 세력은, 동학이 세상을 어지럽히고 국민들을 속이는 종교라 하여 박해하였으며, 마침내 최제우를 처형하였다.

동학의 교세는 교조의 순교로 한때 위축되었으나, 제2대 교주 최시형의 노력으로 농촌 사회에 착실하게 뿌리를 내렸으며, 신도 조직을 갖추어 갔다.

◇ 학습 정리 ◇

1. 조선 후기에는 신분 간의 상하 이동이 활발해져서 점차 양반 중심의 신분제가 무너져 갔다.

2. 세도 정치하에서 국가 기강이 문란해지고 부정 부패가 심해지자, 조선 사회는 큰 혼란을 겪게 되었다.

3. 삼정의 문란, 관리의 수탈, 거듭되는 재해 등으로 농촌 사회는 피폐해졌으며, 전국 각지에서 민란이 자주 일어났다.

4. 학문적 연구를 통해 자발적으로 수용된 천주교는 거듭된 박해 속에서도 농촌 사회와 서민층 사이에 계속 전파되어 그 교세가 확장되었다.

5. 농촌 사회의 고난과 사회 불안 속에서 천주교의 전파와 외세의 침략적 접근에 자극되어 민족적, 민중적 종교인 동학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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