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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한 민국 정부의 수립

〔학습 개요〕

국내외에서 줄기차게 펼쳐졌던 독립 운동과 연합국의 승리로, 우리 민족은 일제의 압제에서 벗어나 광복을 맞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정부를 수립할 때까지 또 다른 시련을 겪지 않으면 안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세계 여러 나라는 민주, 공산 양대 진영으로 갈라졌고, 그 날카로운 대립은 우리 나라에도 영향을 끼쳤다. 그리하여 우리 나라는 38도선을 경계로 국토가 분단되는 비극을 겪어야만 했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우리는 대한 민국 임시 정부의 정통성을 이은 자유 민주 국가 체제의 대한 민국 정부를 수립하였다.

학습 문제

1. 우리 민족은 어떠한 힘을 바탕으로 광복을 맞이할 수 있었는가?

2. 38도선은 왜 생겼으며, 그것은 우리 민족에게 어떠한 문제를 가져왔는가?

3.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의 신탁 통치안 결정에 대하여 우리 민족은 어떻게 대처하였는가?

4. 대한 민국 정부는 어떠한 과정을 거쳐 수립되었으며, 그 의의는 무엇인가?

8⋅15 광복

1945년 8월 15일, 제2차 세계 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나자, 우리 민족은 일제의 가혹한 식민 통치로부터 벗어나 마침내 감격스러운 광복을 맞게 되었다. 우리가 광복을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은, 연합국의 승리가 가져다 준 결과이기도 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그 동안 우리 민족이 꾸준히 전개해 왔던 독립 운동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국내에서의 끈질긴 독립 운동, 만주와 연해주 지역에서의 줄기찬 항일 무장 투쟁, 대한 민국 임시 정부의 외교 활동과 한국 광복군의 대일 항전, 그리고 민족의 잇단 의거 활동 등이 광복의 밑거름이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우리 민족의 독립 운동과 강렬한 독립 의지가 있었기에, 우리 민족은 중국을 비롯한 세계 여러 나라의 후원을 받을 수 있게 되었고, 연합국의 지도자들은 카이로 회담과 포츠담 회담에서 우리 민족의 독립을 약속하였던 것이다.

8⋅15 광복으로 외국에 망명했던 애국 지사들과 일본 등지로 징용당해 나갔던 동포들이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우리 민족은 우리의 손으로 우리 나라를 세울 수 있다는 희망과 기쁨에 가득 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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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의 기쁨
광복의 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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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토의 분단

우리 민족의 감격적인 광복은 곧바로 독립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미국과 소련의 정치적, 군사적 이해에 따라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군사 분계선이 설정되고, 미⋅소 양국의 군대가 우리 나라의 남과 북에 각각 진주하였기 때문이다. 소련군은 1945년 8월에 북한에 진주하였고, 미군은 9월 초에 남한에 진주하여 일본군을 무장 해제시켰다.

38도선은 처음에 미⋅소 양국에 의해 단순한 군사적 경계선으로 그어졌다. 그러나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유 진영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공산 진영의 대립이 심해지면서 냉전이 시작되자, 38도선은 정치적 분할선으로 바뀌게 되어, 우리 민족은 국토의 분단이라는 뜻밖의 시련을 맞게 되었다. 이 시련은 아직까지 계속되고 있으며, 우리에게 민족 통일이라는 커다란 민족적 과제를 남겨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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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도선 푯말
38도선 푯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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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직후의 남한과 북한

광복과 더불어 국내의 일부 지도자들은, 조선 건국 동맹을 기반으로 하여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를 결성하고, 독립 국가의 건설을 준비하였으며, 오랫동안 금지당했던 정치 활동도 시작하였다. 또, 수많은 독립 투사들이 많은 정당과 사회 단체를 조직하였다.

남한에 진주한 미군은 3년간 군정을 실시하였다. 미 군정하에서의 남한은 정국이 안정되지 못하고 혼란이 거듭되었다. 그것은 수많은 정당과 사회 단체들이 난립하였고,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이 날카롭게 대립하였기 때문이었다. 또, 많은 해외 동포들과 독립 투사들이 귀국하여, 서로의 주장이 통일되기가 어려웠고, 그러한 가운데 공산주의자들의 방해 활동이 심하였기 때문이었다.

남한의 정국이 정당의 난립과 좌우 정파의 대립으로 어지러울 무렵, 1945년 10월에는 미국에서 독립 운동을 하고 있던 이승만이 귀국하고, 이어서 다음 달에는 김구 등 대한 민국 임시 정부의 지도자들이 귀국하였다 이들 지도자들도 군정이 끝난 후 정부를 수립할 것에 대비하여 정당과 단체를 만들었지만, 서로의 의견이 엇갈리고 정치적 경험이 성숙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정국의 혼란은 계속되었다.

한편, 북한에서는 광복 직후에 민족주의자들이 중심이 되어 평안 남도 건국 준비 위원회가 조직되었다. 그리고 평안 남도 이외의 각 도에서도 지역 자치 기구들이 결성되었다. 그러나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은 건국 준비 위원회 등의 각종 기구들을 공산주의자들이 주도하는 인민 위원회나 인민 정치 위원회로 개편시켰다. 소련군 사령부는 이 인민 위원회를 소련 군정의 대행 기관으로 내세웠다.

북한에서도 여러 정치 세력들이 등장하였다. 그 가운데에서도 조만식 등의 민족주의 세력과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그런데 소련군 사령부는 민족주의 세력을 제거하고, 공산주의자들을 지원하여 공산 정권을 수립하게 하였다. 이에, 민족주의 계열의 많은 지도자들이 남한으로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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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만식
조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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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탁 통치 문제

1945년 12월에 모스크바에서 미국, 영국, 소련의 3국 외상 회의가 개최되었다. 이 회의에서는 한국에 임시 민주 정부를 수립하기 위하여 미⋅소 공동 위원회를 설치하고, 또 한국을 5년을 기한으로 미국, 영국, 중국, 소련의 4개국이 신탁 통치를 실시한다고 결정하였다.

이러한 신탁 통치안은 우리의 역사와 민족의 역량을 무시한 것이고, 또 우리 민족이 염원하는 독립을 지연시키는 것이었다. 이에 우리 민족은, 결연히 일어나 신탁 통치 반대 운동을 맹렬히 전개하였다.

광복 후, 독립 정부의 수립을 고대하던 국민들은, 신탁 통치의 결정을 민족에 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였으며, 이승만, 김구 등이 중심이 되어 신탁 통치 반대 국민 총동원 위원회가 결성되면서 반탁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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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탁 통치 반대 운동
신탁 통치 반대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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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공산주의자들까지 반탁 운동에 참가하여 민족적 단합의 계기가 마련되는 듯하였으나, 소련의 사주를 받은 그들은 하룻밤 사이에 태도를 바꾸어 찬탁을 주장하였다. 남한에서는 민족주의 진영이 반탁 운동을, 공산주의 진영이 찬탁 운동을 전개함으로써 좌우 대립이 치열해졌고, 북한에서는 반탁을 주장한 조만식이 소련군 당국에 의해 연금되고, 반탁 운동은 금지되었다.

신탁 통치안에 대한 우리 민족의 격렬한 반대 운동에도 불구하고, 신탁 통치 문제와 한국 임시 민주 정부의 수립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미⋅소 공동 위원회가 서울에서 개최되었다. 이 때에 소련측은 찬탁을 주장한 단체들만으로 임시 정부를 수립할 것을 고집하였고, 미국측은 모든 정치 단체의 참여를 주장하였다. 이리하여 두 차례에 걸쳐 개최되었던 미⋅소 공동 위원회는 양국의 주장이 대립하여 결렬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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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소 공동 위원회
미⋅소 공동 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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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소 공동 위원회가 결렬되면서 독립 정부를 수립하려는 우리 민족 앞에는 많은 어려움이 가로놓이게 되었다. 미⋅소의 대립과 냉전 체제, 민족 지도자들의 분열, 민족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의 대립 등은 민족의 통일된 독립 정부 수립을 어렵게 만들고 있었다.

대한 민국 정부의 수립

미⋅소 공동 위원회가 결렬되자, 미국은 한국의 독립 문제를 미⋅영⋅중⋅소의 4개국 외상 회의에 상정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소련은 모스크바 3상 회의의 합의 사항이 아니라는 이유로 이를 거부하였다. 이에 미국은, 한국의 독립 문제를 유엔에 상정하였다(1947).

유엔 총회는 9개국으로 구성된 유엔 한국 임시 위원단을 설치하고, 유엔 감시하에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하여 조속히 통일 독립 정부를 수립하자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리하여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인도 등 9개국으로 구성된 유엔 한국 임시 위원단이 서울에 도착하여 활동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소련은 유엔 한국 임시 위원단의 입북을 거절하였기 때문에, 북한 지역에서의 총선거 실시는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에 유엔 소총회는, 선거가 가능한 지역에서만이라도 총선거를 실시하여 한민족의 독립 정부를 수립할 것을 결의하였으며, 유엔 한국 임시 위원단은 남한에서 총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정하였다.

한편, 통일 독립 정부의 수립을 열망한 김구, 김규식 등은 단독 정부의 수립을 반대하고 남북 협상을 추진하였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고,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술책에 이용당하였다는 비판을 듣기도 하였다.

마침내 1948년 5월 10일, 남한에서는 유엔 한국 임시 위원단의 감시 아래 제헌 국회를 구성하기 위한 총선거를 실시하였다. 5⋅10 총선거는 우리 나라 역사상 최초로 실시된 민주 선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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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0 총선거
5⋅10 총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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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헌 국회에서는 민주 헌법을 제정하여 7월 17일에 공포하고, 초대 대통령으로 이승만을 선출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행정부를 구성하여, 8월 15일에 대한 민국 정부의 수립을 국내외에 선포하였다(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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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민국 정부 수립 선포식
대한 민국 정부 수립 선포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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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민국은 역사상 우리 국토에 우리 민족의 손으로 세운 최초의 민주 공화국이다. 일제의 침략으로 나라를 잃은 이래, 한민족이 염원하던 우리의 정부가 수립된 것이었다.

한편, 그 해 12월에 파리에서 개최된 유엔 총회에서는 대한 민국이 한반도에 있어서의 유일한 합법 정부임을 절대 다수로 승인하였다. 이로써, 대한 민국은 국제적으로 정통성을 인정받게 되었고, 자유 우방의 지지를 받아 민주주의 국가로 발전하게 되었다.

◇ 학습 정리 ◇

1. 우리 민족은 줄기찬 독립 운동과 연합국의 승리의 결과로 8⋅15 광복을 맞이하였다.

2. 38도선을 경계로 미⋅소 양국의 군대가 주둔하였고, 군정이 실시됨으로써 민족의 광복은 곧바로 독립으로 이어지지 못하였다.

3.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에서 결정한 신탁 통치안은, 우리 민족의 독립 염원을 외면한 것이었으므로 격렬한 반탁 운동이 일어났다.

4. 유엔의 결의에 따라 총선거가 실시되고, 국회에서 헌법이 제정된 후, 민주 공화국인 대한 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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