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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발해의 발전

학습 개요

발해는 만주 지방에서 대조영을 중심으로 고구려 유민들에 의하여 건국되었으며, 지배층은 고구려인이었고, 고구려 계승 의식이 뚜렷하였다.

발해는 옛 고구려 영토의 대부분을 차지함으로써, 신라와 함께 남북국의 형세를 이루었다. 또, 만주를 지배하여 우리 민족의 활동 무대를 유지하였다.

발해는 고구려의 전통을 이어 제도를 정비하였으며, 고구려 문화의 기반 위에 당 문화의 영향을 받아 독자적인 문화를 이룩하였다. 발해는 거란의 침입으로 붕괴되었으나, 그 문화의 전통과 유민은 고려에 흡수되었다.

학습 문제

1. 발해의 건국 과정과 민족 구성은 어떠하였는가?

2. 전성기 때 발해의 지배 영역은 어떠하였는가?

3. 발해의 문화는 어떠한 특색을 지니고 있는가?

4. 발해사를 우리 민족사에 포함시켜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발해의 건국

고구려가 멸망하자, 대동강 이남 지역은 신라가 지배하였으나, 만주 지역은 당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 때 고구려의 유민들은 여러 갈래로 분산되었다. 일부 귀족층은 신라와 당으로 끌려가기도 하였으나, 만주 일대에 머물러 있던 유민들은 고구려 부흥 운동과 당에 대한 저항 운동을 끈질기게 전개하였다.

이 때, 고구려의 장군이었던 대조영은 고구려의 유민과 말갈족을 이끌고 지금의 길림성 돈화시 동모산에서 발해를 세웠다(698). 발해의 지배층은 고구려인이었으며, 그들은 말갈족의 여러 촌락을 통솔하였다. 발해의 건국으로 만주는 계속 우리 민족의 활동 무대가 되었다.

발해는 당나라를 견제하면서 성장하였다. 무왕 때에는 흑수부 말갈을 쳐서 송화강과 흑룡강 유역까지 영토를 넓혔고, 해군을 이끌고 당의 산둥 지방까지 공격하여 서쪽으로의 진출을 꾀하였다.

문왕 때에는 당과 친선 관계를 맺고 당의 발달된 문물 제도를 받아들여 많은 업적을 남겼다. 영역의 확장에 따라 수도를 동모산에서 상경 용천부로 옮겼다.

발해가 가장 융성했던 시기는 9세기 전반이었다. 이 때 발해는 유학생을 보내어 당의 제도와 문화를 받아들었고, 또 요하의 중류 유역까지 진출하여 요동 지방을 확보하였다.

이리하여 발해의 영역은 북쪽으로는 흑룡강, 동쪽으로는 연해주, 서쪽으로는 요동, 남쪽으로는 영흥 지방에까지 이르렀다. 이로써 발해는 만주의 대부분과 연해주 지역을 차지하여, 선왕 때에는 해동 성국이라 불릴 정도로 전성기를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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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의 영역
발해의 영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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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제도의 정비

발해는 독자적인 연호를 쓸 정도로 왕권이 강화되면서 정치 제도를 정비하였다. 중앙관제는 정당성, 선조성, 중대성의 3성 아래 6부가 있었다.

발해의 3성은 당의 3성 6부제를 모방하였으나, 그 운영 방식은 독특하였다. 즉, 3성은 정당성을 중심으로 운영되었고, 정당성 아래에 6부를 두어 국사를 나누어 처리하게 하였다. 그리고 국가의 중요한 일은 귀족들이 정당성에 모여 회의를 열어 결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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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의 중앙 관제
발해의 중앙 관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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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 행정 구역은 5경 15부 62주로 조직되었다. 특히, 5경은 상경을 중심으로 하여 5도의 교통망으로 연결되었다. 그리고 말단에 있는 촌락은 토착 세력가에 의해서 다스려졌는데, 이는 고구려 계통의 지배층이 말갈의 전통적인 사회 조직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두 민족 간의 조화를 꾀한 것이었다.

대외 관계

발해는 처음에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정신이 뚜렷하여 일본에 보낸 외교 문서에도 고구려 왕이라고 기록할 정도였다. 그러므로 발해는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과 신라에 대해서는 적대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에 발해는 북쪽으로는 돌궐과 통하고, 남쪽으로는 바다 건너 일본과 친선 관계를 맺었다.

당은 신라와 말갈족을 이용하여 발해를 견제하였기 때문에, 발해의 무왕은 당의 산둥 지방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그 후, 문왕 때에는 당과 평화 교섭을 통해 당의 제도와 문화를 적극 받아들여 국력을 신장시켰고, 일본과도 교류하였다.

그리고 발해의 대외 교통로 중에 당, 거란, 일본으로 가는 길과 함께 신라로 가는 길인 신라도가 있었고, 신라 국경에서 발해의 동경 용원부까지 역이 설치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두 나라 사이에도 교류가 행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만주에서 그 세력을 떨쳤던 발해는, 9세기 후반부터 국력이 약화되어 거란족에게 멸망되었다(926). 발해의 멸망으로 고구려 계통의 지배층은 대거 고려에 흡수되었으나, 만주 지역이 우리 민족의 역사 무대에서 떨어져 나가는 아쉬움을 남겼다.

발해의 문화

발해는 지배층이 주로 고구려인이었으므로, 당 문화의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고구려 문화를 계승하여 독자적인 문화를 이룩하였다.

발해는 유학이 발달하였는데, 주자감이란 대학이 있어서 유학자를 배출하였고, 발해의 유학생들 중에는 당나라에 가서 과거에 합격한 사람도 많았다.

또, 불교도 자못 융성하여 발해의 승려들이 당에 유학하기도 하였고, 상경성에서는 불상, 석등, 연꽃무늬 기와 등 뛰어난 불교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들 유물의 대부분은 고구려의 양식을 계승하여 웅장하고 건실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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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의 무늬 벽돌
발해의 무늬 벽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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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문화도 발달하여, 상경은 당의 수도인 장안성을 본따 외성을 두르고, 그 안에 내성을 쌓았다. 그리고 내성 남문에서 외성 남문까지 직선으로 주작 대로를 내고, 화려하면서도 웅장한 왕궁을 지었다. 이 안에서 온돌 장치가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고구려의 전통을 이은 것이었다.

한편, 발해의 옛 도읍지를 중심으로 많은 고분이 남아 있다. 그 중에서 문왕의 딸인 정혜 공주와 정효 공주의 묘가 유명한데, 앞의 것은 남쪽에 입구를 가진 굴식 돌방무덤이며, 뒤의 것은 벽돌무덤이다. 정혜 공주 묘 안의 천장 양식에서는 소박한 고구려 문화의 영향을 찾을 수 있는 데 반해, 정효 공주 묘의 벽화는 당 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 세련된 문장으로 쓰여진 묘지가 출토되었는데, 이를 통해 당시 발해의 한문 수준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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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효 공주 묘지
정효 공주 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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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움글

* 발해의 건국

668년에 고구려가 나⋅당 연합군에 의해 멸망하자, 당은 고구려의 옛 땅을 지배하기 위하여 평양에 안동 도호부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고구려의 유민 3만여 호를 당나라 영토 안으로 옮겨 살게 하였다. 이 때 대조영 일가도 요서 지방 영주 땅으로 옮기게 되었다. 당시 영주는 당나라가 동북방의 이민족을 견제하기 위해 설치한 전략 도시였다. 이 곳에는 고구려 유민 외에 말갈인, 거란인 등도 본거지에서 강제로 옮겨져 살고 있었다.

696년, 당의 감시와 억압에 시달리던 거란족의 이진충 등이 반란을 일으키자, 대조영은 말갈 추장 걸사비우와 함께 고구려 유민과 말갈인을 이끌고 영주를 빠져 나와 요하를 건너 동쪽으로 이동하였다. 이에 당은 거란족 출신의 이해고에게 군대를 주어 이들을 토벌하게 하였다. 대조영이 이끄는 군대는 천문령에서 당군과 일대 결전을 벌여 당군을 섬멸하는 전과를 올렸다. 당군을 격퇴시킨 대조영은 길림성 돈화시 동모산 근처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워 ‘진’이라 하였다. 현재 남아 있는 성산자 산성이 그 유적지이다.

학습 정리

1. 발해는 고구려 유민의 부흥 운동에 의해 건국되었는데, 지배층은 고구려 유민이고, 피지배층은 대부분이 말갈족이었다.

2. 발해는 만주의 대부분과 연해주 및 한반도의 북부를 지배하였다.

3. 발해 문화는 고구려 문화의 전통을 바탕으로 하여 당의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발전하였고, 웅장하고 건실한 특색을 지니고 있다.

4. 발해는 고구려 부흥 운동에 의해 건국되었고, 고구려 문화의 전통을 계승하였으며, 스스로 고구려의 계승자임을 자처하였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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