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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 산업의 발달

2. 산업의 발달

학습 개요

17세기 후반 이후 농업 생산력이 크게 증가하여 농민 가운데에는 넉넉한 생활을 하는 사람이 늘어 갔으며, 이에 따라서 농민들의 일부는 그 지위가 향상되었다.

농업과 함께 상업과 수공업도 크게 발달하였다. 도시에서는 난전을 중심으로 자유 상인의 활동이 활발하였고, 농촌에서는 장시를 중심으로 교역이 번창하였으며, 국경 지방에서는 무역이 성행하였다. 경제 활동이 활발해짐에 따라 화폐가 전국적으로 유통되었고, 여러 가지 경제 조직도 생겨났다.

이와 같은 산업의 발달로 상공업의 중심지에는 인구가 증가하여 도시가 발달하였다.

학습 문제

1. 조선 후기의 농업은 어떻게 발달하였는가?

2. 조선 후기의 상공업 활동은 전기에 비하여 어떻게 달라졌는가?

3. 조선 후기의 국제 무역은 어떻게 이루어졌으며, 주로 어느 지역의 상인들이 이에 종사하였는가?

모내기법

17세기 후반 이후 농민들은 수리 시설을 늘리고 묵은 땅을 다시 일구어 농토를 넓히는 한편, 농업 기술을 발달시켰다. 농업 기술의 발달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모내기법의 보급이었다.

모내기법은 볍씨를 바로 논에 뿌릴 때보다 김매기의 노력이 적게 들고 소출도 많았다. 또, 모내기를 할 때까지 논을 이용할 수 있어 벼와 보리의 이모작을 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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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 기술의 발달은 밭농사에서도 일어났다. 농민들은 밭이랑을 높이 만들고 고랑에 씨앗을 뿌렸다. 이렇게 하면 추운 겨울과 가뭄이 잦은 봄에 자라는 곡식이 추위와 가뭄을 덜 타게 되어, 북쪽 지방에서도 겨울 작물을 재배할 수 있었다.

이 밖에 거름 주는 방법도 개선하였고, 낫, 호미, 쟁기 등의 농기구도 개량하였다. 농업 기술의 발달로 농지를 이용하는 방식도 바뀌어 이어짓기나 2년 3작 등의 돌려짓기가 가능하게 되었다.

일부 농민들은 시장에 내다 팔 수 있는 상품 작물을 재배하였다. 상품 작물로는 인삼, 담배, 약재 등의 특용 작물을 비롯하여, 목화, 삼, 모시 등의 의류 작물이 주로 재배되었다. 또, 감자나 고구마 등도 재배되어 모자라는 식량에 도움이 되었다.

농업 생산이 크게 늘어남에 따라, 농민들 중에는 넓은 농토를 경작하는 부농이 나타났으나, 한편에서는 농토를 잃은 가난한 농민이 많아졌다. 농토를 잃은 농민들은 대부분 머슴살이를 하거나, 농촌을 떠나 상인, 수공업자나 포구와 광산의 노동자가 되기도 하였다.

수공업

17세기 후반 이후 수공업이 크게 발달하였다. 조선 전기에는 수공업 기술자들이 국가의 통제를 받으면서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수공업품을 만들어 바쳤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이르러 수공업품을 찾는 사람이 늘어나자, 수공업 기술자들은 나라에 강제로 징발되는 것을 피하면서, 점차 팔기 위한 제품을 만들었다.

이에 따라 관영 수공업은 쇠퇴하고 민영 수공업이 발달하였다. 수공업자들은 마침내 자유로운 생산 활동을 하게 되었고, 전문적으로 상품을 생산하기에 이르렀다.

수공업품이 잘 팔리자, 농민 가운데서도 수공업을 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일부 농민은 자기 집에서 쓰기 위해 만들던 것을 이제는 시장에 내다 팔기 위해 제품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대동법이 실시된 후, 국가에서 필요한 물자를 공인들을 통하여 사들이게 되자, 공인들의 상업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수공업 활동은 더욱 활기를 띠었다. 주요 생산품으로는 유기, 나전 칠기, 도자기, 종이, 죽세공품과 농기구 등이 있었다. 수공업품 중의 일부는 특정 지역의 특산품이 되어 전국적으로 알려질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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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특산물
조선 후기의 특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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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인과 자유 상인

조선 후기에는 상업 활동도 활발히 전개되었다. 조선 전기에는 시전 상인이 국가의 보호 아래 상업 활동을 하는 정도였고, 그 밖의 상인들의 활동은 부진하였다. 그러던 것이 대동법을 실시하면서 국가가 공인을 통해 필요한 물자를 사들이게 되자 상업 활동이 활발해졌다.

공인은, 국가로부터 대가를 받고 국가가 필요로 하는 물자를 전국 각지에서 사들여 관청에 납품하는 상인이었다. 이들은 여러 가지 유리한 조건으로 상업 활동을 펴 많은 이득을 보았다. 조선 후기의 상업과 수공업은 이들의 활동으로 크게 발달하였다.

공인의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자유 상인들이 점차 상업 활동에 참가하기 시작하였다. 자유 상인은 난전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시전 상인과 자주 대립하였다. 이 때문에 시전 상인들의 불만이 커지자, 국가는 시전 상인들에게 자유 상인을 단속할 수 있는 금난전권을 주었다.

금난전권은 자유로운 상업 활동을 막는 것이어서 이번에는 자유 상인들이 이의 폐지를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정조 때에는 육의전을 제외한 모든 시전 상인들의 금난전권을 폐지하였다. 이로써 자유 상인들은 보다 자유롭게 상업 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리하여 상업이 더욱 발달하여 한양, 평양, 개성, 대구 등 도시 지역에서는 상설 시장이 서고, 농촌에서는 장시가 발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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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패(남대문 밖) 시장도
칠패(남대문 밖) 시장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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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시는 15세기 후반부터 발생하기 시작하여 18세기 중엽에는 전국적으로 1천여 개로 늘어났다. 교통이 편리한 곳에 위치한 장시는 상업의 중심지가 되었다. 충청도의 강경장, 경상도의 마산포장, 함경도의 원산장 등이 이러한 장시였다.

전국 곳곳에 장시가 생기고 상업 활동 지역이 넓어지자, 전국을 무대로 활동하는 대상인이 나타났다. 이들 중에는 공인이나 시전 상인보다 훨씬 큰 자본을 가진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한편, 지방 장시에는 보부상들이 돌면서 활발한 상업 활동을 폈다. 이들은 조선 초기부터 소규모로 일용 잡화를 가지고 각지로 행상하던 상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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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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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시 무역

조선 전기에는 외국과의 무역이 활발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17세기 이후에 들어와 상업이 발달하고, 청 및 일본과의 교류가 잦아지면서 자연히 무역 활동도 활발해졌다. 청과는 개시 무역이 시작되었고, 이어서 사신이 왕래하는 기회에 상인들에 의하여 후시 무역이 이루어졌다. 일본과는 왜관 개시를 통한 무역이 이루어졌다.

청과의 무역은 개성, 평양, 의주의 상인들이 주로 하였고, 일본과의 무역은 동래의 상인들이 주로 하였다. 이리하여 국제 무역을 통하여 거부로 성장하는 자유 상인들도 많이 나타났다. 이 중에서도 송상이라고 불리는 개성 상인들의 활동이 특히 두드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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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상업 활동과 무역
조선 후기의 상업 활동과 무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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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평통보

17세기 이전에는 상품 거래에서 주로 쌀이나 베를 화폐 대신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상업이 발달함에 따라, 이를 대신할 새로운 화폐가 필요하게 되었다. 이러한 필요에서 동전이 조선 후기에 널리 사용되기에 이르렀다. 조선 후기에 널리 유통된 동전은 상평통보였다. 상평통보는 17세기 말 이후로는 전국적으로 사용되었다. 이와 같이 동전이 널리 쓰이자, 상품의 매매에는 물론이고 품삯, 세금, 소작료까지 동전으로 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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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평통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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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발달

조선 후기에는 도시의 모습도 변화하여 갔다. 조선 전기에는 한양을 비롯하여 전주나 평양 등 감영 소재지가 행정의 중심지로 중요 도시를 이루고 있었다. 또, 의주, 동래 등 국경 도시나 군사 요지가 큰 도시로 발돋움하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는 이들 도시와 더불어 새로운 상업 도시가 발달하였다. 생산 활동이 활발해지고 상품 화폐 경제가 발달함에 따라 농촌 인구가 증가하는 한편, 일부 농촌 인구가 지방의 상업 도시나 교통 요지로 모여들었다. 그리하여 강경, 원산, 대구 등이 상업 도시로 발달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농촌의 인구와 도시의 인구가 다 같이 뚜렷한 증가를 보였다. 당시의 인구 조사는 오늘날과 같이 철저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정확한 것은 아니나, 19세기 초의 전국 인구는 750여만 명이었다고 한다.

도움글

* 개시와 후시

조선 시대에 중국과의 무역은 양국 간의 합의에 의해 국경 지역에서 공적으로 이루어지는 개시(開市) 무역과, 이를 이용하여 상인들 사이에 사사로이 이루어지는 후시(後市) 무역이 있었다. 이에는 중강 개시와 후시, 책문 후시, 그리고 회령 개시와 경원 개시 등이 있었다.

중강 개시는 임진왜란 중에 요동 지방에서 군량과 말을 구하기 위해 조선측이 명나라에 요청하여 개설되었는데, 전란이 끝난 후 폐지되었다. 이 중강 개시는 인조 24년 청나라의 경제적 필요에 의해 다시 개설되었고, 매년 3월 15일과 9월 15일 두 차례씩 개시일을 정하고, 쌍방의 감시하에 무역을 하였으며, 사무역은 엄격히 금지되었다. 그러나 금령이 점차 해이해짐에 따라 자유 상인의 활동이 커져, 후시 무역이 성황을 이루었다.

17세기 중엽부터는 사신의 왕래를 계기로, 압록강 건너 봉황성의 책문에서 후시가 열렸다. 사신들이 책문을 출입할 때, 역관들과 결탁한 의주와 개성의 상인들이 은, 인삼을 가지고 사신의 행렬을 따라가 청국 상인들과 교역을 하였다. 책문 후시 무역은 매년 4~5차에 이르렀고, 한 차례의 교역에서 거래되는 은의 양만도 10만 냥에 달하였다고 한다.

학습 정리

1. 조선 후기에는 모내기법 등 농업 기술이 보급되어 농업 생산이 늘고, 상품 작물도 널리 재배되었다.

2. 조선 후기에는 관영 수공업이 쇠퇴하고 민영 수공업이 발달하였고, 공인과 자유 상인의 활동이 활발해졌으며, 화폐가 널리 유통되었다.

3. 조선 후기에는 청, 일본과의 국제 무역이 활발해졌고, 개성, 의주, 동래의 상인들이 크게 활약하였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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