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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천주교와 동학

학습 개요

세도 정치로 정치 기강이 어지러워지면서 탐관 오리의 착취에 시달리던 농민들은 정신적 위안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인간의 평등을 내세운 천주교와 동학이 농촌 사회와 민중들 사이에 전파되었다.

이에, 집권층은 양반 사회의 통치 질서를 부정하는 천주교와 동학이 널리 전파되는 것을 막으려고 여러 차례의 박해를 가하였다. 그러나 정부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천주교는 보다 널리 퍼지고, 동학은 농촌 사회에 급속히 확산되었다.

학습 문제

1. 세도 정치 시기에 민간 신앙이 성행하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

2. 천주교와 동학이 민중의 환영을 받은 반면, 집권층에게 박해를 받은 까닭은 무엇인가?

3. 조선 후기 동학의 발생 배경은 무엇인가?

민간 신앙

세도 정치하에서 서민들은 살기가 어려워지자, 초월적인 힘에 의지하여 정신적 구원을 얻으려는 경향이 나타났다. 이에 따라 새 세상이 오기를 바라는 예언 사상이 민중 사이에 퍼지기 시작하였다.

예언 사상으로는, 이씨 왕조가 망하고 정씨 왕조가 들어선다는 정감록의 예언 사상, 미래불인 미륵불이 지상 세계에 내려와서 중생을 구원한다는 미륵 신앙이 널리 유행하였다. 이 중에서도 정감록이 가장 널리 유행하였다. 이러한 예언 사상은 새로운 세상을 바라는 민중들의 소망을 나타낸 것으로, 그들에게 새 세상이 온다는 희망을 불어넣어 주었다.

이 시기에는 무속 신앙도 널리 보급되고 있었다. 무속 신앙은, 무당이 굿이나 풀이로 귀신을 달래어 화를 멀리하고 복을 비는 신앙이었다. 이러한 민간 신앙은 19세기 민중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 사회가 불안한 속에서 더욱 번성하였다.

천주교의 전래

조선 후기에 서양 문물이 우리 나라에 전해지자, 일부 학자들이 이를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이를 서학이라 한다. 서학은 중국에 와 있던 선교사들을 통해서 서양 문물과 함께 전해졌기 때문에, 자연히 서학에는 천주교 서적이 포함되어 있었다. 따라서, 서학을 깊이 연구하는 과정에서 천주교를 신앙으로 믿는 사람들이 나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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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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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차원에서 천주교를 믿기 시작한 것은 정조 때에 들어와서의 일이었다. 이 무렵에 이승훈이 청에서 서양인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돌아온 뒤, 마침내 교회가 창설되기에 이르렀다. 처음에는 정권에 참여하지 못한 남인 학자나 중인들이 천주교를 많이 믿었으나, 뒤에는 교인들의 노력으로 점차 서민층과 여성 중에서 천주교를 믿는 사람들이 많이 나왔다.

이와 같이 우리 나라의 천주교 신앙은 선교사들에 의하여 전래된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에 걸친 학문적 연구를 통하여 자발적으로 믿게 되었다는 데에 그 특색이 있다.

천주교 박해

초기의 교회는 학식을 가진 양반이나 중인들이 주축을 이루었고, 신앙 활동은 한양, 내포, 전주 등을 중심으로 하여 전개되었다.

천주교를 믿는 사람들이 광범위하게 늘어나자, 정부는 천주교를 금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천주교가 유교의 제사 의식을 무시하였고, 천주교의 인간 평등과 내세 사상이 성리학적인 사회 질서를 근본적으로 그르칠 수 있는 위험스러운 것으로 이해되었기 때문이었다.

정조 때에는 천주교를 심하게 탄압하지 않았으나, 순조가 즉위하면서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대대적으로 시작되었다. 이후 몇 차례에 걸친 큰 박해로 수많은 신도와 우리 나라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 등이 순교하였다. 그러나 천주교는 계속적인 박해에도 불구하고, 정치의 부패와 사회의 불안으로 인하여 서민과 여성들 사이에 전파되어 그 교세가 크게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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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두산 순교 기념관(서울 합정동)
절두산 순교 기념관(서울 합정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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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의 발생

사회가 혼란하고 민심이 불안한 가운데 당시의 종교는 그 구실을 다하지 못하였다. 불교는 산중에 머물러 사회와 유리되어 있었고, 유교도 농민과는 거리가 멀었다. 또, 새로 전래된 천주교가 서민과 여성들 사이에 전파되고 있었으나, 서양 세력의 침략 위협으로 대외적 위기감이 높아 가고 있었던데다가, 서양에서 들어온 종교였기 때문에 경계하는 사람이 많았다.

이러한 때에, 경주 지방의 몰락 양반인 최제우는 전통적인 민간 신앙과 유교, 불교, 도교를 융합하여 동학을 창시하였다(18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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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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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은 서양 세력의 침략적 접근과 천주교의 전파가 우리의 것을 해치고 우리 사회를 위태롭게 한다는 믿음에서, 우리의 것을 지키고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구원을 주고자 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동학 운동은 단순한 신앙 운동만이 아니라, 어지러운 정치와 어두운 사회를 바로잡고, 어려운 민중의 생활을 구제하려는 사회 운동이라 할 수 있다.

동학의 교리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은 인내천, 즉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것이었다. 이에 따르면, 인심은 곧 천심이요, 사람을 섬기는 것은 곧 하늘을 섬기는 것이라 하였다. 이는 신분이나 계급을 초월하여 모든 인간이 평등해야 함을 뜻하는 것이다. 동학이 사회적으로 압박받는 농민들에게 환영을 받은 까닭이 여기에 있었다.

동학은 이와 같은 교리를 바탕으로 하여 농촌 사회에 급속히 퍼져, 그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이에, 정부는 동학이 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속이는 종교라 하여 교조 최제우를 처형하고, 동학을 탄압하였다. 동학의 교세는 교조의 순교로 인하여 한때 위축되었으나, 제2대 교주 최시형의 노력으로 농촌 사회에 착실하게 뿌리를 내렸으며, 교단 조직도 갖추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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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유사(동학의 가사집)
용담유사(동학의 가사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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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 정리

1. 세도 정치 시기에 탐관 오리의 수탈로 살기가 어렵게 되자, 민중들 사이에는 예언 사상과 민간 신앙이 널리 퍼졌다.

2. 천주교와 동학은 인간 평등 사상을 내세워 민중의 환영을 받았으나, 인간 평등 사상은 집권층에게는 양반 사회의 통치 질서를 부정하는 것으로 이해되어 박해를 받았다.

3. 농촌 사회의 고난과 서양 세력의 접근에 대응하여 민족적, 민중적 종교인 동학이 일어나 농민들 사이에 급속히 전파되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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