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대 국사 교과서
  • 6차 교육과정
  • 중학교 국사 6차(하)
  • Ⅳ. 근대화의 추구
  • 3. 동학 농민 운동

3. 동학 농민 운동

학습 개요

강화도 조약 이후 일본의 경제적 침투로 농민의 생활이 어려워져 갔다. 그러나 정부는 농민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지 못하였다.

이에 농민들은 그들을 위한 정치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개혁을 주장하며, 외세의 침략을 막고 나라를 지키려는 대규모의 농민 운동을 일으켰다. 여기에 농민 사이에 널리 보급되어 있던 동학의 조직이 농촌 사회에 깊이 뿌리 내려 농민 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

동학 농민 운동을 계기로 안으로는 갑오개혁이 추진되고, 밖으로는 청과 일본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다.

학습 문제

1. 강화도 조약 이후 일본의 경제적 침투로 농촌 경제가 입은 타격은 어떠하였는가?

2. 동학 농민 운동에서 농민들이 주장한 내용은 무엇인가?

3. 동학 농민 운동은 국내외적으로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가?

외세의 침투

갑신정변 이후, 우리 나라의 주변 정세는 복잡하게 전개되었다. 청과 일본의 세력 다툼이 심해졌고, 러시아와 영국까지도 우리 나라를 넘보았다. 러시아는 연해주에 군항 블라디보스토크를 건설하고 조선에 그 세력을 뻗어 왔다.

이에 영국은 우리 나라의 거문도를 불법적으로 점령하고 포대를 설치하여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영국은 러시아가 조선의 영토를 점령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하자 물러났다

확대보기
거문도 사건과 러시아의 남하
거문도 사건과 러시아의 남하
팝업창 닫기

조선을 둘러싼 열강의 경쟁이 심해지자 국내외에서 조선을 중립국으로 하자는 주장이 나오기도 하였다.

방곡령

갑신정변 이후에 청나라와 일본 상인들이 경쟁적으로 침투하여 조선의 농촌 사회는 더욱 피폐해졌다. 특히, 일본 상인들은 영국산 면제품과 일본에서 생산되는 일용품을 가져와서 비싼 값으로 팔고, 쌀이나 콩 등의 곡식과 금 또는 쇠가죽을 싼 값으로 사 갔다.

일본 상인들은 농촌 곳곳에서 쌀을 사 갔으므로 우리 나라 농촌에는 쌀이 부족해져서 농민의 생활이 어려워져 갔다. 그리하여 함경도와 황해도 등지에서는 지방관들이 곡식의 유출을 금지하는 방곡령을 내렸다. 이에 일본 정부는 방곡령의 실시에 절차상의 문제가 있다고 트집을 잡아 조선 정부에 배상을 강요하였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우리 나라 농민들은 일본의 경제적 침략에 강한 반감을 품게 되었으며, 점차 일본을 배척하는 기운이 확산되어 갔다.

개항 후의 대일 무역
연도 수입 수출
1877.7.~1878.6. 228,554 원 119,539 원
1878.7.~1878.12. 142,618 원 154,707 원
1879 566,953 원 677,061 원
1880 978,013 원 1,373,672 원
1881 1,944,731 원 1,882,659 원
1882.1.~1882.6. 742,562 원 897,225 원
확대보기
1893년의 무역량
1893년의 무역량
팝업창 닫기

또, 이러한 분위기에서 정부와 부패한 관리들에 대한 불만도 커져갔으며, 농민들 사이에서는 점차 정치의 개혁을 주장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동학의 성장

밖으로 외세의 침투에 대한 반감과 안으로 부패한 정치에 대한 불만으로 농촌 사회에서는 새로운 변화를 기대하는 기운이 높아 갔다. 이에 전통 사상과 개혁 사상을 내포한 동학이 농촌 사회에 급속히 퍼져 나갈 수 있었다.

동학은 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속인다는 이유로 교조 최제우가 처형되어 한때 그 세력이 위축되었다. 그러나 동학은 제2대 교주인 최시형의 활약으로 충청도 보은 지방을 중심으로 각지에 교단을 조직하고 교세를 넓혀 나갔다.

동학의 교세가 점점 커지자, 교도들은 교조 최제우의 억울한 죄명을 풀어 줄 것과 동학 교도에 대한 관리들의 탄압을 중지할 것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동학 교도들은 전라도 삼례에서 집회를 열었고, 다시 그들의 대표들이 서울에 와 대궐 앞에서 국왕에게 직접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정부에서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충청도 보은에서 대규모 집회를 다시 열어 교조의 신원, 외세의 배척, 탐관 오리의 숙청 등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동학 농민 운동의 전개

이처럼 농촌 사회의 분위기가 어수선할 때, 전라도 고부 군수 조병갑이 여러 가지로 부정을 저질러 농민들의 원성을 샀다. 그는 자기 부친의 선정을 기리는 비석을 세운다고 농민들에게서 많은 경비를 거두었다. 그리고 이전부터 사용하던 저수지를 버리고 농민들을 동원하여 새로운 저수지를 만들고는 약속과 달리 추수할 때 물세를 받아들였다. 이에 농민들은 마을의 지도적 인물인 전봉준을 앞세워 여러 차례 시정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조병갑의 탐학이 더 심해지므로, 분개한 농민들과 동학 교도들이 전봉준의 지휘로 고부 관청을 습격하고 새로 만든 저수지를 무너뜨렸다(1894).

이에 정부에서는 관리를 보내어 사태를 조사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군수의 비행에 대해서는 책임을 묻지 않고 농민들에게 모든 책임을 물어 주동자를 잡아 가두고 처벌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동학 교도를 중심으로 농민들이 다시 일어났으며, 인근 지역에서도 호응하기 시작하여 농민 봉기는 삽시간에 전라도 전 지역으로 번져 나갔다.

확대보기
사발 통문
사발 통문
팝업창 닫기

이 때 전봉준이 이끈 동학 농민군은 부패한 정치를 바로잡아 백성을 구하고 나라를 평안히 하자는 주장을 내세웠다. 동학 농민군은 황토현 싸움에서 관군과 싸워 승리하였으며, 장성에서는 정부에서 보낸 정예 부대마저 격퇴하였다.

확대보기
황토현 전적비(전북 정읍)
황토현 전적비(전북 정읍)
팝업창 닫기

이어 동학 농민군은 각지에서 관군을 물리치고 북상하여 마침내 전주를 점령하였다. 이처럼 동학 농민군의 세력이 점점 커지자, 이를 진압할 자신이 없는 정부는 청나라에 군대를 파견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청이 군대를 파견하자, 일본도 조선에 있는 일본인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군대를 파견하였다.

한편, 정부는 농민군과 타협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농민군은 정부가 개혁을 실시하겠다는 약속을 받고 전주에서 철수하였다.

집강소의 설치

전주에서 철수한 동학 농민군은 일종의 자치적 행정 기구인 집강소를 전라도 각지에 설치하고, 신분제의 폐지와 토지의 균등한 분배 등을 목표로 개혁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개혁을 위한 농민의 자발적인 노력은 정부의 적극적인 협조가 없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이 때 일본군이 경복궁에 침입하여 국왕을 위협하는 침략적 행위를 저지르고 있었다. 이에 동학 농민군은 일본의 침략을 막기 위하여 다시 궐기하였다.

그러나 북상하던 동학 농민군은 우수한 무기를 가진 일본군과 관군에게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패하였으며, 전봉준 등 지도자들이 잡힘으로써 농민군의 봉기는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확대보기
체포되어 압송되는 전봉준
체포되어 압송되는 전봉준
팝업창 닫기

동학 농민 운동은 비록 실패로 끝났으나, 우리 나라가 근대 사회로 발전하는 데 중요한 영향을 주었다. 동학 농민 운동을 계기로 안으로는 갑오개혁이 추진되었고, 밖으로는 청⋅일 전쟁이 일어나게 되어 동아시아 정세에 큰 영향을 끼쳤다.

도움글

* 공주 우금치 전투

고부에서 처음 봉기한 동학 농민군은 전라도 여러 지역을 점거하고 전라 감영이 있던 전주성까지 점령하였다. 이 무렵 정부는 스스로의 힘으로 동학 농민군을 진압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청나라에 원병을 요청하였다. 청나라가 조선에 군대를 파견하자, 일본도 자기 나라의 거류민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즉각 군대를 파견하였다. 이리하여 조선을 둘러싸고 청⋅일 양국 사이에는 전쟁의 기운이 감돌게 되었다.

이러한 급격한 정세의 변화 속에서 동학 농민군은 집강소에서 정세만을 관망하고 있을 수 없었다. 더욱이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고 새 정권을 세웠다는 소식은 일본에 대한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이에 동학 농민군은 전봉준, 손화중 등의 지도하에 척왜를 부르짖으며 다시 봉기하였다.

이 때 모인 동학 농민군의 수는 10만여 명에 이르렀다. 전봉준이 거느리는 동학 농민군은 관군의 근거지인 공주를 향해 진격하였으나, 도중에 상당수가 이탈하였다. 전봉준은 공주성을 공격하기 위해 전주 지방에 주둔하고 있던 김개남과 광주 지방의 손화중에게 통문을 보내 합세하도록 요청하였다.

당시 정부군은 공주 본영과 계룡산 뒤편에 병력을 나누어 배치하고 있었는데, 동학 농민군이 공격하자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던 우금치로 후퇴하였다. 이후 우금치를 둘러싸고 동학 농민군과 정부군⋅일본군 사이에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우금치 전투는 동학 농민군으로서는 운명을 건 일대 혈전이었다. 그러나 6, 7일간에 걸쳐 계속된 50여 회의 공방전 끝에 우수한 근대식 무기와 장비로 무장한 일본군에게 동학 농민군은 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참패하고 말았다.

그 후 동학 농민군의 주력 부대는 1만여 명의 병력 중 겨우 살아남은 500여 명으로 항전을 계속하면서 남쪽으로 후퇴하다가 후일을 기약하면서 모두 해산하였다.

이로써 고부 봉기로부터 1년여에 걸쳐 전개되었던 동학 농민 운동은 결국 실패하였다. 그러나 동학 농민군은 뒤에 항일 의병 전쟁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확대보기
동학 농민군 위령탑(충남 공주)
동학 농민군 위령탑(충남 공주)
팝업창 닫기

학습 정리

1. 조선의 농민들은, 일본 상인들이 면제품 등의 공산품을 비싸게 팔고 쌀⋅콩 등 농산물을 헐값에 가져가서, 이중으로 피해를 입었다.

2. 동학 농민 운동에서 농민들은 부패한 정치를 바로잡아 백성을 구하고 외세를 배척하여 나라를 평안히 하자고 주장하였다.

3. 동학 농민 운동은 안으로는 갑오개혁, 밖으로는 청⋅일 전쟁의 계기가 되었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