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족들 간의 격심한 왕위다툼은 신라의 전통적인 신분 질서인 골품제를 뒤흔들어 사회의 혼란을 가져왔다. 신라 사회가 혼란에 빠지자, 6두품 세력과 지방의 호족 세력이 사회 변화를 앞장서서 이끌었다.
6두품 세력은 진골 위주의 사회 체제에 특히 반발을 보인 계층이었다. 그들은 중앙 귀족이면서도 관직 승진에 제한을 받았기 때문에 큰 불만을 품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은 골품제의 모순을 앞장서서 비판하면서 새로운 활로를 찾으려고 하였다. 6두품 출신인 최치원이 정계를 떠나 유랑 생활을 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이들은 새로운 정치 감각을 가지고 새로운 사회 건설을 추구하였다.
한편, 중앙에서 진골 귀족들이 서로 다투는 동안, 지방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키워 온 호족들이 진골 귀족 중심 사회를 타도하고자 나섰다. 이들 호족 중에는 촌주 출신이 많았으나, 중앙에서 지방으로 내려온 세력이나 해상 세력, 군사 세력도 있었다.
촌락의 행정을 맡고 있던 촌주들은 일반 농민들보다 많은 토지와 소, 말 등의 가축을 소유하여 경제력을 키울 수 있었다. 호족들은 촌락민을 동원하여 촌락 주위에 성을 쌓고 자신의 군대를 거느리면서 스스로 성주나 장군으로 일컫기도 하였다.
이들은 지방을 직접 다스리면서 관리를 두어 세금을 거두었다. 그리고 농민 세력을 모으는 한편, 선종 승려나 6두품의 지식인을 맞아들이면서 통치력을 길렀다. 그리하여 호족들은 신라 정부에 도전하면서 점차 새로운 사회를 준비해 나갔다.
최치원의 행적
최치원은 6두품 출신으로, 당 유학을 마치고 고국에 돌아온 후, 진성여왕에게 개혁안을 올려 정치 개혁을 요구하기도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래서 혼란한 세상에 뜻을 잃고 전국 각지를 유람하다가 해인사에서 일생을 마쳤다. 그는 유학자인 동시에 불교와 도교에도 조예가 깊은 사상가로서, 고려 건국에 큰 영향을 주었다.⋅ 해상 왕국의 꿈을 키운 장보고 ⋅
9세기 초에 ‘바다의 왕자’로 세력을 떨쳤던 장보고는 대표적인 해상 세력 출신이었다. 그는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고 해외 무역에 종사하여 이름을 크게 떨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