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대 국사 교과서
  • 7차 교육과정
  • 중학교 국사 7차
  • Ⅲ. 통일 신라와 발해
  • 2. 신라의 동요와 후삼국의 형성
  • [1] 신라 말기에 지식인들과 지방 세력은 어떤 움직임을 보였나?
  • 새로 등장한 지방 세력들

새로 등장한 지방 세력들

귀족들 간의 격심한 왕위다툼은 신라의 전통적인 신분 질서인 골품제를 뒤흔들어 사회의 혼란을 가져왔다. 신라 사회가 혼란에 빠지자, 6두품 세력과 지방의 호족 세력이 사회 변화를 앞장서서 이끌었다.

6두품 세력은 진골 위주의 사회 체제에 특히 반발을 보인 계층이었다. 그들은 중앙 귀족이면서도 관직 승진에 제한을 받았기 때문에 큰 불만을 품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은 골품제의 모순을 앞장서서 비판하면서 새로운 활로를 찾으려고 하였다. 6두품 출신인 최치원이 정계를 떠나 유랑 생활을 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이들은 새로운 정치 감각을 가지고 새로운 사회 건설을 추구하였다.

한편, 중앙에서 진골 귀족들이 서로 다투는 동안, 지방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키워 온 호족들이 진골 귀족 중심 사회를 타도하고자 나섰다. 이들 호족 중에는 촌주 출신이 많았으나, 중앙에서 지방으로 내려온 세력이나 해상 세력, 군사 세력도 있었다.

촌락의 행정을 맡고 있던 촌주들은 일반 농민들보다 많은 토지와 소, 말 등의 가축을 소유하여 경제력을 키울 수 있었다. 호족들은 촌락민을 동원하여 촌락 주위에 성을 쌓고 자신의 군대를 거느리면서 스스로 성주나 장군으로 일컫기도 하였다.

이들은 지방을 직접 다스리면서 관리를 두어 세금을 거두었다. 그리고 농민 세력을 모으는 한편, 선종 승려나 6두품의 지식인을 맞아들이면서 통치력을 길렀다. 그리하여 호족들은 신라 정부에 도전하면서 점차 새로운 사회를 준비해 나갔다.

최치원의 행적

최치원6두품 출신으로, 당 유학을 마치고 고국에 돌아온 후, 진성여왕에게 개혁안을 올려 정치 개혁을 요구하기도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래서 혼란한 세상에 뜻을 잃고 전국 각지를 유람하다가 해인사에서 일생을 마쳤다. 그는 유학자인 동시에 불교와 도교에도 조예가 깊은 사상가로서, 고려 건국에 큰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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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상 왕국의 꿈을 키운 장보고

9세기 초에 ‘바다의 왕자’로 세력을 떨쳤던 장보고는 대표적인 해상 세력 출신이었다. 그는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고 해외 무역에 종사하여 이름을 크게 떨쳤다.
장보고는 당에 건너가 군인으로 출세하였다. 그러던 중 신라인이 당의 해적들에게 잡혀 와 노비로 팔리는 것을 보고 분개하여 귀국 후 흥덕왕을 뵙는 자리에서 “저에게 청해를 지키는 일을 맡기신다면, 해적들이 우리 나라 사람들을 노비로 끌고 가는 것을 막겠습니다.”라고 요청하였고, 왕은 장보고에게 군사 1만 명을 주어 군대를 조직하고, 청해진을 설치하게 하였다. 청해진은 당에서 흑산도와 남해안을 거쳐 일본의 기타큐슈에 이르는 국제 무역 항로의 중간에 해당하는 곳이었다. 그는 이 곳을 기지로 하여 해적을 소탕하고 황해의 무역로를 보호하면서 황해 일대의 해상권을 장악함으로써 당-신라-일본을 연결하는 국제 무역을 주도하였다.
장보고는 당시 신라인들이 많이 살고 있던 산둥성에 법화원이라는 절을 짓고 이 곳을 무역의 거점으로 삼았으며, 아울러 신라인의 친목과 단결, 안녕을 꾀하는 정신적 위안처로 만들었다. 중국을 순례하던 중에 법화원에서 신세를 진 일본의 승려 엔닌에게 일본으로 돌아갈 배편을 구해 준 적이 있었다. 이 때의 고마운 마음을 전하는 엔닌의 편지를 통해서 그의 명성은 이미 국제적으로 높아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와 명성을 얻게 되었고, 서남 해안 일대의 커다란 해상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그 뒤 왕권다툼에 간여하여 신무왕이 왕위에 오르도록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문성왕 때에 자기 딸을 왕비로 삼으려다가 그의 세력을 두려워한 진골 귀족들이 보낸 자객에게 암살당하였다.
무성 서원 | 전북 정읍
청해진 대사 장보고 영정
청해진 유적지(장도) | 전남 완도
적산 법화원 | 중국 산둥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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