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란 후, 일본은 조선에 사신을 보내어 통교할 것을 여러 차례 요청해 왔다. 이에 조선은 승려 유정을 일본에 파견하여 조선인 포로들을 데려온 뒤, 다시 국교를 맺었다. 그러나 조선은 일본 사신이 서울에 들어오는 것을 금하고, 동래의 왜관에서만 일을 보고 돌아가게 하였다. 이에 비해, 통신사는 일본의 에도(도쿄)까지 가서 막부의 장군을 만나는 등 활발한 외교 활동을 벌였다.
통신사는 일본의 요청을 받고 일본에 건너가 극진한 대우를 받았으며, 일본의 문화 발전에 공헌하였다. 그들이 다녀간 후에는 일본 내에 조선의 문화와 풍속이 퍼질 정도였다.
그러나 일본에서 통신사에 대한 반대 여론이 확산되어, 200여 년간 유지되어 오던 통신사의 파견은 19세기 초에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