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9년 11월 3일, 전남 광주에서 한⋅일 학생 사이에 일어난 충돌을 계기로, 평소의 민족 차별에 대한 분노와 반일 감정이 폭발하여 대규모의 반일 학생 시위가 일어났다. 이 일은 순식간에 전국으로 퍼져, 각지에서 많은 학생들이 항일 시위를 벌였고, 일반 국민들까지 가담하였다.
이 운동이 전국적인 민족 운동으로 전개된 데에는 1927년에 결성된 신간회의 활약이 컸다.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은 일제의 민족 차별에 대한 반대 투쟁으로서, 3⋅1 운동 이후에 일어난 반일 학생 투쟁 가운데에서 가장 규모가 큰 민족 운동이었다. 그리고 이 운동은 이제까지의 동맹 휴교 형태에서 벗어나 가두 시위 형태로 발전하였고, 일제 식민지 통치를 정면으로 부정하였다.
광주 학생 항일 운동 이후에도 학생들은 비밀 결사를 조직하여 일제의 식민지 지배에 대항하는 독립 운동을 전개하였다.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의 규모
1929년 11월 3일부터 1930년 3월까지 전국적으로 149개교 54,000명의 학생이 참가하였다.⋅ 신간회의 활동 ⋅
신간회는 일제하에서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의 민족 운동가들이 모두 참여한 최대 규모의 정치⋅사회 단체로서, 지방에도 조직을 갖추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