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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고사(中古史) - 제2편 부여족(扶餘族)의 웅비(雄飛) 시대
  • 제1장 삼국(三國)이 갑자기 서다

제1장 삼국(三國)이 갑자기 서다

단군(檀君)의 후손이 쇠약해진 이후로 한반도의 강산에는 다른 족속[異族]이 가득 차게 되었으니, 기씨(箕氏)가 가면 위씨(衛氏)가 오고, 위씨가 가니 유씨(劉氏)가 와서 1000여 년의 역사 동안 외부의 민족들이 그 세력을 마음대로 행사하고 우리 신성한 부여족(扶餘族)은 북방의 한 모퉁이에서 명맥을 겨우 보전하고 있었다. 천운(天運)이 다시 돌아와서 삼국이 돌연 일어나니, 이에 저 기씨⋅유씨와 같은 지나(支那)의 민족들은 항복의 깃발을 세우고, 패배한 군대를 거두어 들여서 이후로는 수천 년 동안 산해관(山海關)1)중국 하북성(河北省) 북동쪽에 있는 관문으로서 만리장성의 동쪽 끝에 해당하며, 중국 동북 지방으로 통하는 교통로상의 요지이다. 바깥으로는 단 한 발도 다시 내딛지 못하였다. 이는 우리의 4000년 역사상에 가장 장하고 또 가장 영화로웠던 시대이니, 독자들은 눈을 씻고 자세히 보아야 할 것이다.

단기 2277년(서기전 57)에 옛 진한(辰韓)의 땅에서 신라(新羅)가 일어났고, 단기 2297년(서기전 37년)2)원문에는 2296년으로 되어 있으나,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따르면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한 해는 전한(前漢)의 원제(元帝) 건소(建昭) 2년(서기전 37년)으로서 단기 2297년이므로 바로잡는다.에 졸본 부여(卒本扶餘)에서 고구려(高句麗)가 일어났으며, 단기 2316년(서기전 18년)3)원문에는 2315년으로 되어 있으나,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온조가 백제를 건국한 해는 전한의 성제(成帝) 홍가(鴻嘉) 3년(서기전 18년)이라 단기 2316년이므로 바로잡는다.에는 백제(百濟)가 하남(河南) 위례성(慰禮城)에서 일어나서 세 나라가 병립하여 솥의 세 다리와 같은 형세를 이루었다.

신라의 시조(始祖) 박혁거세(朴赫居世)는 진한의 고허부장(高墟部長) 소벌공(蘇伐公)의 양자로서 총명하였기 때문에 6부(部)【양산(楊山)⋅고허(高墟)⋅대수(大樹)⋅진지(珍支)⋅가리(加利)⋅명활(明活)】의 사람들이 추대하여 왕으로 세웠는데, 이때 나이가 13세였다. 서야벌(徐耶伐)【지금의 경주(慶州)】에 도읍을 정하고 알영(閼英)을 왕후로 삼았는데, 성스러운 덕이 있었기 때문에 당시 ‘이성(二聖)’이라고 불렀다. 왕이 6부를 순행하면서 농업과 뽕나무 재배[農桑]를 권하여 감독하였으며, 변한(弁韓)이 귀부하여 오고 동옥저(東沃沮)가 와서 좋은 말을 바쳤다.

고구려의 태조(太祖) 동명 성왕(東明聖王) 고주몽(高朱蒙)은 부여의 왕 금와(金蛙)의 아들이다. 기골과 모습이 영특하고 장대했으며, 활을 잘 쏘았기 때문에 그의 배다른 형제들이 그를 꺼려서 죽이고자 하였다. 주몽이 이를 두려워하여 졸본 부여로 도망가서 나라를 세우고 나라 이름을 고구려라고 하였다. 도읍을 비류강(沸流江) 상류에 정하고 ‘고(高)’를 성씨로 삼았으며, 성곽을 쌓고 궁궐을 지었다. 비류국(沸流國)의 왕 송양(松讓)이 스스로 와서 복종하였으며, 행인국(荇人國)을 정벌하고 북옥저(北沃沮)를 멸망시켜 나라의 경계를 확대하였다.

백제의 시조 고온조(高溫祚)는 고구려의 왕 고주몽의 아들이다. 주몽이 북부여(北扶餘)에 있을 때에 예씨(禮氏)에게 장가들어 유리(類利)를 낳았다. 이후에 졸본 부여로 가서 그 왕의 딸을 맞아들여 아들 둘을 낳았으니, 첫째는 비류(沸流)이고, 둘째는 온조이다. 주몽이 왕위에 오른 후에 유리가 부여로부터 졸본으로 와서 태자(太子)가 되었다. 두 명의 아들은 자신들이 해를 입을까 염려되어 오간(烏干)⋅마려(馬黎) 등 10명과 함께 남쪽으로 내려갔다.  비류는 미추홀(彌鄒忽)【지금의 인천(仁川)】에 자리를 잡고, 온조는 하남 위례성【지금의 직산(稷山)】에 자리를 잡아 나라 이름을 십제(十濟)라고 하였는데, 마한(馬韓) 왕이 동북쪽 100리를 나누어 주었다.

후에 비류가 죽자 그의 신하들이 모두 위례성으로 귀부하여 왔다. 이에 나라 이름을 백제로 바꾸었으며, 그 계통이 부여에서부터 나왔으므로 성씨를 ‘부여’라고 하였다. 낙랑(樂浪)과 말갈(靺鞨)을 격파하고 한산(漢山)【지금의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도읍을 옮겼다. 또 나라의 경계를 정하였는데, 북쪽으로는 패하(浿河)【지금의 평산(平山) 저탄(猪灘)】에 이르렀고, 남쪽으로는 웅천(熊川)【지금의 공주(公州)】까지 이르렀으며, 동쪽은 주양(走壤)【지금의 춘천(春川)】에 이르렀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와 접하였다. 5부 37군 200개의 성을 포괄하였으며, 이후에 마한을 공격하여 멸하고 그 땅을 모두 병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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