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대 국사 교과서
  • 개화기 및 대한제국기
  • 대동청사 1책
  • 중고사(中古史) - 제2편 부여족(扶餘族)의 웅비(雄飛) 시대
  • 제6장 일본(日本)과의 관계

제6장 일본(日本)과의 관계

신라(新羅)는 일본과 인접하여 빈번하게 교류하는 관계에 있었으니, 시조(始祖) 박혁거세(朴赫居世)의 시대에는 일본이 신라의 변경을 침입하고자 하였다가 신라 왕에게 성인(聖人)의 덕이 있다는 말을 듣고 물러갔다. 조분왕(助賁王)의 시대에는 일본이 신라 영토에 들어와 노략질을 하자 이찬(伊飡) 우로(于老)가 맞서 싸웠는데, 이때 바람을 타고 불을 놓으니 일본 병사들이 물로 뛰어들었다가 모두 죽었다. 흘해왕(訖解王)의 시대에는 일본이 사신을 보내 혼인 관계 맺기를 요청하였으나 신라가 허락하지 않으니 국교가 끊기고, 곧이어 일본이 신라를 침구하여 금성(金城)을 에워쌌다. 신라 왕은 문을 닫아 걸고 나아가지 않다가 일본 병사들이 나태하고 수척해진 틈을 타서 장군 강세(康世)로 하여금 강력한 기병(騎兵)을 일으켜 격파하게 하였다. 내물왕(奈勿王)의 시대에는 일본이 침입하여 노략질을 하자 왕이 짚으로 허수아비를 만들어 무기를 들린 후에 토함산(吐含山)【경주(慶州)의 동쪽에 있다.】 아래에 나열하여서 가짜 병사들로 삼고, 용맹한 군사들을 부현(斧峴)의 동쪽 벌판에 매복시켰다가 일본 병사들이 용맹함을 믿어 주위를 살피지 않고 경솔하게 진군하는 틈을 타서 갑자기 공격하여 크게 격파하여 거의 다 목을 베어 버렸다. 그 후에 또다시 일본이 침입하여 노략질하고 금성을 포위하자 장수와 병사들이 모두 나가 싸우고자 하였는데, 왕이 말하기를 “지금 적군이 다시금 깊이 침입하여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고자 하니, 그 기세를 당해 낼 수가 없다.”라고 하고, 이에 성문을 닫아 걸고 굳게 지켰다. 그러다가 일본 병사들이 퇴각하는 틈을 타서 용맹한 기병들로 그 퇴각로를 차단하고, 또 보병(步兵)으로 하여금 독산(禿山)【경주군의 동쪽에 있다.】까지 추격해 가서 협공하게 하여 크게 격파하니, 죽이거나 사로잡은 자들이 매우 많았다.

실성왕(實聖王)의 시대에는 일본이 군영(軍營)을 쓰시마 섬[對馬島]에 설치하고 병사들을 훈련시키고 군량을 비축하면서 신라를 침입하려는 의도를 가졌다. 왕이 병사를 일으켜 먼저 공격하려고 하다가 미사품(未斯品)의 간언을 따라서 중지하였다. 눌지왕(訥祗王)의 시대에는 왕의 동생인 미사흔(未斯欣)이 일본에 볼모로 갔는데, 왕이 그 동생을 생각하여 박제상(朴堤上)을 시켜 일본의 왕을 설득하여 돌아오도록 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왕이 들어주지 않자 박제상이 일본 왕을 속이고 미사흔을 고국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이에 일본 왕이 노여워하여 극악한 형벌을 가하면서 심문을 하자 박제상이 말하기를, “나는 계림(鷄林)의 신하이므로 우리 임금의 뜻을 이루어 드린 것이다.”라고 하였다. 일본의 왕이 더욱 분노하면서 자신의 나라에 신하로서 복종하라고 하자 박제상이 말하기를, “계림의 돼지나 개가 될지언정 일본의 신하는 되고 싶지 않으며, 계림의 회초리는 달게 받을지언정 일본의 황금은 받지 않겠다.”라고 하였다. 이에 그의 다리를 찢고, 가시나무를 베어다가 그 위를 내달리게 하였으며, 또 달군 쇳덩이 위에 올라서게 하였으나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다가 죽었다. 자비왕(慈悲王)의 시대에는 일본이 동해에 침입하여 노략질을 하니, 왕이 장군 덕지(德智)에게 명하여 쳐서 패퇴시키게 하였다. 태종 무열왕(太宗武烈王)의 시대에는 장군 김유신(金庾信)이 대군을 거느리고 일본을 정벌하여 오사카[大阪]를 함락하였다. 성덕왕(聖德王)의 시대에는 일본이 군함 300척을 보내 동해안 변경 지역에 침입해 노략질을 하자 왕이 군사를 일으켜 격파하였다. 혜공왕(惠恭王)의 시대에는 김암(金巖)을 일본에 보내어 화호(和好)를 맺었다.

백제(百濟)는 고이왕(古爾王)의 시대에 왕인(王仁)을 일본에 보내 『논어(論語)』와 『천자문(千字文)』을 가르치고, 또 이로하[伊呂波]【일본의 글자】를 제정하여 보급하니, 일본의 문학이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무령왕(武寧王) 이후로는 여러 박사(博士)를 자주 파견하고 온갖 장인(匠人)의 기술을 모두 가서 가르치게 함으로써 일본의 문학과 기예, 복식(服式)과 제도가 모두 백제로부터 나오게 되었으니, 백제는 진실로 일본에 대하여 어머니의 나라라고 할 수 있다.

고구려(高句麗)는 광개토왕(廣開土王)의 시대에 신라를 구원하고자 신라에 침입한 일본을 격파하였고, 장수왕(長壽王)은 일본에 사신을 보냈다가 일본 측의 국서(國書)가 거만하다는 이유로 화친을 끊었다가 후에 다시 사신을 보내 교류하였다. 보장왕(寶藏王)의 시대에는 사신의 왕래가 여러 차례 있기는 하였지만, 영토가 북방에 위치하여 일본과의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그 관계 또한 소원하여 백제나 신라와 같지 않았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