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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7장 가락(駕洛)과 임나(任那) 및 탐라(耽羅)

제7장 가락(駕洛)과 임나(任那) 및 탐라(耽羅)

단기 2375년(42) 신라(新羅) 유리왕(儒理王)의 시대에 신라 남쪽에 한 나라가 창립하였으니, 곧 가락이다. 시조왕(始祖王) 김수로(金首露)가 세워서 나라 이름을 가야(伽耶)【지금의 김해(金海)】라고 하였다가 후에 금관(金官)이라 바꾸고, 그의 동생 5명을 나누어 보내 5가야의 왕이 되게 하니, 곧 아라 가야(阿羅伽耶)【함안(咸安)】, 고령 가야(古寧伽耶)【함창(咸昌)】, 성산 가야(星山伽耶)【성주(星州)】, 대가야(大伽耶)【고령(高寧)이니, 시조는 이진아시왕(伊珍阿豉王)1)원문에는 이진아고왕(伊珍阿鼓王)으로 되어 있으나, 이진아시왕(伊珍阿豉王)으로 바로잡는다., 소가야(小伽耶)【고성(固城)】이며, 이들을 총칭하여 가락국이라고 한다. 수로왕이 성곽을 쌓고 궁궐을 조영하였으며, 신라의 남쪽 지역을 차지하고 허씨(許氏)를 맞아들여 왕후로 삼았다. 수로왕은 사람됨이 영민하고 총명하였으며, 사리에 밝아서 이웃 나라와의 갈등을 말 한 마디로 해결하였다. 돌아가셨을[崩] 때에 나이가 158세였다.

그 아들 거등(居登)은 볼모를 신라로 보내 도움을 요청하여 외적의 침입을 막았고, 마품왕(麻品王)과 거질미왕(居叱彌王), 이시품왕(伊尸品王)을 거친 후 좌지왕(坐知王)은 용녀(傭女)를 취하고 그 무리를 총애하였다가 국가의 형세가 크게 어지러워졌다. 이에 신하 박원도(朴元道)의 간언에 따라 용녀를 내치게 하였는데, 이때에 신라가 가야를 침공하려고 하다가 왕이 잘못을 뉘우쳐 바로잡았다는 소식을 듣고 중지하였다. 그 뒤로 또 취희왕(吹希王)과 질지왕(銍知王), 겸지왕(鉗知王)을 거친 후에 구형왕(仇衡王)은 신라와 혼인 관계를 맺었으나 끝내는 화호가 깨어지고 그 북쪽 경계 지역이 여러 차례 침범을 당하였다. 결국 단기 2865년(532) 신라 법흥왕(法興王) 19년2)원문에는 법흥왕 18년으로 되어 있으나, 구형왕이 항복한 해는 532년이므로 법흥왕 19년으로 바로잡는다.에 신라에 항복하니, 신라 왕이 손님을 맞는 예로써 대우하고, 그 나라를 내려 주어 식읍(食邑)으로 삼게 하였다. 이로써 가락국은 10대 왕 490년 만에 멸망하였다.

대가야는 임나라고도 하며, 남가야(南伽耶)【소가야】 등 7개국이 속하여 있었는데, 단기 2896년(563)에 신라 진흥왕(眞興王)이 그 영역을 멸망시키고 대가야군을 설치하였다. 대개 가락과 임나는 하나의 부락으로서 국력이 미약해서 신라와 백제(百濟)에 의해 제약을 받았다.

탐라는 탐모라(耽牟羅)라고도 하며, 남쪽 바다 한가운데에 있는 나라로서 지금의 제주도(濟州島)이다. 처음에는 사람이 살지 않았는데, 양을나(良乙那)⋅고을나(高乙那)⋅부을나(夫乙那) 세 명의 신인(神人)이 땅속에서 솟아 나와서 놀이삼아 사냥을 하며 살다가 바닷가에서 3명의 여인을 만나 각각 한 명씩 아내로 삼고, 맑은 물이 솟아나고 땅이 비옥한 곳을 택하여 머물러 살았다. 양을나의 거처는 제1도(都)라고 하고, 고을나의 거처는 제2도라고 하였으며, 부을나의 거처는 제3도라고 한 후에 오곡(五穀)을 심고 망아지와 송아지를 기르면서 점점 부유하고 번성하였다.

백제 문주왕(文周王)의 시대에 토산물을 바치자 백제 왕이 기뻐하며 관작(官爵)을 내려주었고, 신라 문무왕(文武王)의 시대에는 고후(高厚)⋅고청(高淸) 등이 신라 조정에 들어가 조회에 참렬하니, 신라 왕이 성주(星主)라는 칭호를 내려주었다. 그 후에 그 왕[主] 도동음율(徒冬音律)이 신라에 항복하여 속국(屬國)이 되었으며, 고려(高麗)가 신라를 멸망시킨 후에 또다시 고려에 복종하였다가 그 후 고려의 판도에 편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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