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대 국사 교과서
  • 개화기 및 대한제국기
  • 대동청사 1책
  • 중고사(中古史) - 제2편 부여족(扶餘族)의 웅비(雄飛) 시대
  • 제13장 외교(外交)의 시대
  • 제1절 거란의 침입과 서희(徐熙)의 강직함 및 강감찬(姜邯贊)의 뛰어난 무공(武功)

제1절 거란의 침입과 서희(徐熙)의 강직함 및 강감찬(姜邯贊)의 뛰어난 무공(武功)

거란[契丹]은 태조(太祖) 때에 낙타[槖駝] 50필(匹)을 조공으로 바쳤는데, 태조는 거란이 이유도 없이 발해(渤海)를 멸망시킨 것을 노여워하여 거란의 사신을 섬으로 유배 보내고 낙타는 만부교(萬夫橋)【지금의 송도(松都) 남문(南門) 밖에 있다.】 아래에 매어 둔 채 굶어 죽게 하였으며, 거란을 정벌하려는 뜻을 지니고 있었으나 이를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정종(定宗) 때에는 최광윤(崔光胤)이 거란에 사로잡혀 갔다가 거란이 장차 고려(高麗)를 침입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고 이를 은밀히 조정에 보고하자 왕이 군사 30만 명을 모집하여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성종(成宗) 원년(982)에 송(宋)나라가 거란을 정벌하고자 하여 고려에 힘을 합쳐 토벌하기를 요청하니, 거란이 두려워하여 화친 맺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이후에 거란의 동경(東京)【지금의 심양(瀋陽)1)원문에는 반양(潘陽)으로 되어 있으나, 심양(瀋陽)으로 바로잡는다. 유수(留守)인 소손녕(蕭遜寧)이 고려를 침공하였는데, 고려가 자신들의 영토를 쳐들어 와 차지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에 왕이 박양유(朴良柔)⋅서희(徐熙)⋅최량(崔亮) 등을 보내 적의 침공을 막게 하고, 왕이 직접 안북부(安北府)【지금의 안주(安州)】에 행차하였다가 선봉에 서서 진을 친 서안(庶顔)이 거란군에게 붙잡혔다는 소식을 듣고는 서경(西京)으로 돌아와 여러 신하를 불러 모아 서경 북쪽의 땅을 거란에게 할애하는 방안에 대해 논의하였다. 이때 서희가 반대하며 말하기를, “땅을 나누어 주는 것은 만세(萬世)에 남을 수치가 될 것입니다. 바라건대 왕께서는 도성으로 돌아가시고, 신 등으로 하여금 한번 싸워 보게 한 후에 다시 논의하더라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지일(李知日)도 말하기를, “선대의 왕들이 일군 강역은 비록 1척(尺)⋅1촌(寸)이라도 남에게 줄 수 없는 것인데, 어찌 경솔하게 영토를 적국에게 주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에 영토를 할애하자는 논의가 마침내 잠잠해졌다. 소손녕이 또다시 안북부를 침범하자 중낭장(中郞將) 문도수(文道秀)와 낭장 유방(庾方)이 맞서 싸워 크게 격파하니, 소손녕이 감히 더 진군하지 못하고 화의(和議) 맺기를 요청하였다. 이에 왕이 여러 신하를 모아 놓고 거란의 진영으로 가기를 원하는 자가 있는지 물었으나 감히 나서는 자가 없었다. 오직 서희만이 가겠다고 청하므로 왕이 마침내 서희를 적진으로 보냈다. 서희가 거란군의 진영에 이르렀는데, 소손녕이 거만하게 굴며 예를 갖추지 않으므로 서희가 말하기를, “지금 두 나라의 대신(大臣)이 서로 만나게 되었는데, 어찌 예를 갖추지 않는 것인가?”라고 하고는 숙소로 가서 드러누워 일어나지 않았다. 소손녕이 사과를 하므로 서희가 비로소 소손녕과 더불어 화친을 의논하게 되었는데, 이때 소손녕이 말하기를, “신라(新羅)와 고구려(高句麗)의 영역은 우리나라의 옛 땅인데, 지금 귀국(貴國)에서 모두 쳐들어와 차지하고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라고 하였다. 이에 서희가 말하기를, “우리나라는 곧 고구려의 후손이다. 이 때문에 나라 이름을 고려라고 한 것이니, 만일 영토를 가지고 따진다면 귀국의 동경도 모두 우리의 영역 안에 있는 것이 된다.”고 하였다. 말하는 기세가 의기(義氣)에 복받치어 강경하며 그 내용이 분명하고 사리에 들어맞으므로 소손녕이 말문이 막혀서 마침내 화의를 맺고는 군대를 철수시켰다.

그날 스스로 비굴함에 빠졌던 조정을 가득 채운 노예와 같은 무리는 모질게 꾸짖어도 부족하다 하겠거니와 성종과 같은 훌륭한 군주마저도 오히려 소손녕의 80만 대군을 두려워하여 영토를 할애하자는 논의를 주창하였다. 이때 위엄 있게 홀로 선 기개로 충만하였던 서희는 단 한 마디의 말로 사사로운 논의를 물리치고, 혼자의 몸으로 수만의 적군 가운데 들어가 적장(敵將)의 교만한 마음을 두려움에 떨게 함으로써 국가의 강토를 유지하였으니, 영구한 세월을 통틀어도 그와 같은 사람은 보기 드물다고 하겠다.

그 후에 박양유2)원문에는 박유량(朴柔良)으로 되어 있으나, 72쪽의 내용을 참고하여 박양유로 바로잡는다.을 거란에 보내 사로잡혀  간 포로들을 되찾아 왔고, 원욱(元郁)을 송나라에 보내 원병(援兵)을 요청하여 거란에 대한 원수를 갚고자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현종(顯宗) 초에 거란의 왕[主]이 보병(步兵)과 기병(騎兵) 40만 명을 거느리고 목종(穆宗)을 시해한 강조(康兆)의 죄를 묻겠다고 칭하고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흥화진(興化鎭)【지금의 의주(義州)에 속한 지역】을 포위하자 왕이 강조와 안소광(安紹光)에게 명하여 방어하게 하였다. 이에 강조가 통주(通州)【지금의 선천(宣川)】로 출병하였다가 거란군에게 피살당하였다. 이어서 거란군이 서경을 공격하니, 왕이 중낭장 지채문(智蔡文)을 보내 구원하게 하였다. 지채문이 성문을 닫고 굳게 지키다가 패배하여 돌아오자 강감찬(姜邯贊)이 왕에게 권유하여 남쪽으로 피난을 가게 하였다. 그 후에 거란군이 개경[京城]을 함락한 후 물러나자 귀주 별장(龜州別將) 김숙흥(金叔興)이 기다리고 있다가 크게 격파하여 1만여 명의 머리를 베었고, 순검사(巡檢使) 양규(楊規)도 또한 거란군 4천여 명을 죽이고 사로잡혔던 남녀 3만여 명을 되찾아 왔으나, 양규와 김숙흥은 하루 종일 죽을힘을 다해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여러 장수가 거란군이 피폐해진 틈을 타서 습격하여 크게 격파하였고, 진사(鎭使) 정성(鄭成)이 또 압록강에서 적군을 크게 격파하였으니 거란의 병사 중 물에 빠져 죽은 자가 태반이었다.

이후에 거란이 여진(女眞)과 연합하여 압록강을 건너려고 하자 대장군(大將軍) 김승위(金承渭)가 공격하여 물리쳤다. 거란은 또 흥화⋅통주⋅용주(龍州)⋅철주(鐵州)⋅곽주(郭州)⋅귀주 등을 요구하였는데, 고려에서 이를 거부하자 다시 통주를 침공하였다. 이에 장군 정신용(鄭神勇)3)원문에는 정신통(鄭神通)으로 되어 있으나, 정신용(鄭神勇)으로 바로잡는다.이 공격하여 패퇴시켰으며, 이듬해에 거란이 다시 흥화진을 침공하자 장군 고적여(高積餘)와 조익(趙弋) 등이 이를 격파하였다. 이후로도 거란은 매년 고려를 침공하였다.

단기 3351년(1018)에 소손녕이 또다시 무장한 군사 10만 명을 거느리고 침공하여 오자 상원수(上元帥) 강감찬과 부원수(副元帥) 강민첨(姜民瞻)4)원문에는 강민첨(羌民瞻)으로 되어 있으나, 강민첨(姜民瞻)으로 바로잡는다.이 군사 20만 8천 명을 이끌고 방어하러 나갔다. 흥화진에 이르러 산 속에 군사들을 매복시키고 쇠가죽으로 큰 강을 막았다가 적군이 강에 이르자 막았던 강을 트고 매복하였던 병사들을 동원하여 소손녕의 군대를 크게 격파하였다. 이에 소손녕이 감히 맞서 싸우지는 못하고 사잇길을 통해 개경으로 곧장 향하다가 마탄(馬灘)에서 시랑(侍郞) 최원(崔元)에게 크게 패배하여 1만여 명의 병사를 잃었다. 소손녕은 또 수도의 방비가 삼엄함을 알고는 군대를 돌렸는데, 강감찬이 귀주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크게 격파하니, 적군의 시체가 들에 가득 찼으며, 획득한 포로와 말⋅낙타⋅갑옷과 투구⋅병장기가 이루 다 셀 수 없을 정도였다. 결국 소손녕은 퇴각하였는데, 살아서 돌아간 적군이 겨우 수천 명에 불과하였다.

강감찬은 국력이 피폐하여지고 외적이 날뛰던 시대에 태어나 단신으로 국가의 운명을 스스로 짊어지고 한 손으로 강한 적군을 섬멸함으로써 나라의 엄준한 기둥이 되었던 것이다.

덕종(德宗) 때에는 왕가도(王可道)와 이단(李端) 등의 계책에 따라 거란을 정벌하고자 하여 사신의 왕래를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써 화호(和好) 관계를 끊고, 유소(柳韶)에게 명하여 국경 지대에 관문[關防]을 설치하게 하였다. 또 의주 인산보(麟山堡)에서부터 함흥(咸興) 도련포(都連浦)에 이르기까지 석성(石城)을 쌓았는데, 그 길이가 1천여 리(里)였으며, 성벽의 높이와 두께는 각각 25척(尺)이었다.

문종(文宗)은 거란과 화호하고 내치(內治)에 주력하였다. 이에 근검절약을 숭상하고 형벌과 옥사(獄事)에 잘못이 없는지 살폈으며, 최제안(崔齊顔)⋅최충(崔冲)과 더불어 당면한 정책의 잘잘못을 논의하였다. 또 군사상의 직무를 상세히 헤아려 시행하였으며, 관리들의 부지런함과 게으름의 여부를 자세히 조사하고 백성들의 고충을 물으니, 나라가 부유해지고 시절이 태평하여졌으며, 거란 및 송나라와 모두 화친(和親)의 관계를 맺었다. 그러다가 후에 여진이 송나라와 함께 거란을 멸망시키고는 북쪽 지역에서 스스로 영웅이라고 칭하면서부터 여진과의 관계가 발생하게 되었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