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대 국사 교과서
  • 개화기 및 대한제국기
  • 대동청사 1책
  • 근고사(近古史) - 제3편 학문의 부흥과 무예 쇠퇴의 시대[文興武衰時代]
  • 제6장 외적과의 관계
  • 제2절 일본의 침입

제2절 일본의 침입

충렬왕(忠烈王) 때에 원(元)나라와 연합하여 일본(日本)을 공격한 후 일본이 항상 고려(高麗)에 원한을 가지고 있다가 충정왕(忠定王) 때에 이르러 고성(固城) 등지에 침입하니, 합포(合浦)【지금의 창원(昌原)】의 천호(千戶) 최선(崔禪)이 이를 격파하였다. 공민왕(恭愍王) 원년(1352)에 일본이 만덕사(萬德社)에 침입하자 전라도 만호(全羅道萬戶) 유탁(柳濯)이 날랜 기병(騎兵)을 이끌고 추격하여 크게 물리쳤으나, 이때부터 일본이 매년 변경 지역을 침입하여 왔다. 이는 일본 내에서 남조(南朝)와 북조(北朝)가 나뉘어 전쟁이 그치지 않으므로 떠돌아다니던 해적(海賊)들이 고려의 해변 지역을 침략한 것으로서 사실 일본 조정에서는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하였다. 그 후에 일본의 해적 3천여 명이 또 진해(鎭海)를 침범하여 노략질을 하므로 경상도 순문사(慶尙道巡問使) 김속명(金續命)이 나아가 싸워서 모두 죽였다. 또 일본 사람으로서 등원경광(藤原經光)이라고 하는 자가 고려에 와서 순천(順天)에 살고 있었는데, 전라도 원수(全羅道元帥)1)원문에는 사(師)로 되어 있으나, 수(帥)로 바로잡는다. 김선치(金先致)가 그를 죽이려고 하자 등원경광이 그 무리를 이끌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이때부터 일본 해적이 더 많이 침입하여 와서 부녀자와 어린아이들을 남김없이 죽여 버렸다. 신우(辛禑) 때에는 공주(公州) 등의 성이 함락되어 양광도 원수(楊廣道元帥) 박인규(朴仁桂)가 전사하였으므로 최영(崔瑩)이 스스로 싸우러 나가기를 청하여 일본 병사들을 홍산(鴻山)에서 크게 격파하였다. 이듬해에 또 일본 해적이 강화도(江華島)에 침입하여 도성 안이 크게 동요하였으므로 신우가 철원(鐵原)으로 도읍을 옮기고자 하였는데, 최영이 힘써 간언하여 그만두게 하였다. 적들이 또 경상도에 침입하자 태조(太祖)께서 그날로 곧장 행군하여 지리산(智異山)에서 외적을 크게 격파하였고, 적들이 서해도(西海道)에 침입하여 노략질을 하자 태조께서 진격하여 해주(海州)에서 크게 물리쳐 모두 죽이셨다.

적이 또 승천부(昇天府)【지금의 풍덕(豊德)】에 침입하여 노략질하므로 태조께서 최영⋅양백연(楊伯淵) 등과 더불어 힘을 합쳐 크게 격파하고, 정몽주(鄭夢周)를 일본에 보내어 따지게 하니, 일본이 승려 신홍(信弘)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해적 무리를 잡아 오게 하였으나, 적들을 온전히 제어할 힘은 없었다.

그 후에 일본의 해적이 또 삼도(三道)2)조선 시대에 충청도⋅경상도⋅전라도 3도를 아울러 하삼도(下三道)라고 하였다.의 바닷가 일대에서 노략질을 하므로 태조께서 변안열(邊安烈)과 더불어 적들을 운봉(雲峰) 인월역(引月驛)에서 맞아 싸웠다. 이때 적군의 장수 아지발도(阿只拔都)가 날래고 용맹하였으므로 태조께서 그의 철갑옷을 쏘아 떨어뜨리시자 편장(偏將) 이두란(李豆蘭)이 곁에 있다가 화살을 쏘아 죽이니, 적군의 기세가 크게 꺾였다. 이로 인하여 태조가 분격하여 크게 격파하시니, 죽은 적의 시체가 들에 가득차고 강물이 모두 붉게 변하였으며, 남은 적은 도망쳐 돌아갔다. 일본의 해적들이 이때부터 태조를 두려워하여 감히 가까이 가지 못하였다.

해적이 또 죽령(竹嶺)【지금의 단양(丹陽)】을 넘어와 단양을 노략질하므로 원수 변안열이 한방언(韓方彦)과 더불어 공격하여 물리쳤다. 당시에 적들이 영남(嶺南) 지방에 가득 차서 백성들이 평안히 지내지를 못하였으므로 최영이 조준(趙浚)을 천거하여 체복사(體覆使)로 파견하여 백성들을 안정시켜 편안[鎭撫]하게 하였다. 이에 조준이 간사한 관리들을 목베어 죽이고 백성들을 잘 보살피면서 일본 해적들을 방어하니, 도(道) 전체가 모두 편안하여졌다. 적이 다시 관동(關東) 등지에서 날뛰다가 또 진격하여 함주(咸州)⋅홍원(洪原)⋅북청(北靑)을 노략질하자 태조께서 이두란과 더불어 길주(吉州)에서 맞서 싸워 크게 물리치니, 죽은 적의 시체로 도랑이 막히고 한 사람도 살아난 자가 없었으며, 이후로 적의 기세가 점점 쇠약해졌다. 일본의 해적이 또 삼남(三南)3)남쪽의 세 도(道)로서 충청도⋅전라도⋅경상도를 가리킨다. 지역에 침입하자 지휘사(指揮使) 정지(鄭地)가 남원(南原)에서 크게 물리쳐 섬멸하였다. 또 조정에 글을 올려서 이키 섬[壹岐島]과 쓰시마 섬[對馬島]을 멸망시켜 영구히 변방의 근심을 없애자고 하였으나, 조정에서 그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못하였다.

창왕[辛昌] 때에 경상도 원수(慶尙道元帥) 박위(朴葳)로 하여금 전함 100척을 거느리고 쓰시마 섬을 정벌하게 하여 일본의 전함 300척과 해안의 가옥들을 모두 불태워 버렸더니, 그 후 공양왕(恭讓王) 때에 일본의 추장(酋長) 미나모토 료순[源了俊]이 사신을 보내어 토산물을 바치고 사로잡아 간 백성들을 돌려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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