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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2장 동쪽과 북쪽 두 외적과의 관계

제12장 동쪽과 북쪽 두 외적과의 관계

세조(世祖)께서는 무신(武臣)을 중용하고 병사와 군마(軍馬)를 양성하여 북쪽을 정벌할 준비를 하셨는데, 오랑캐[野人] 낭복아합(浪卜兒哈)이 회령(會寧)에 머무르면서 변경 지역을 지키는 장수와 분쟁하자 이에 그를 꾀어 내어 죽이고, 신숙주(申叔舟)를 강원 함길도 예찰사(江原咸吉道體察使)로 임명하여 파저강(婆猪江)의 오랑캐를 정벌하였다. 그 후에 어유소(魚有沼)⋅남이(南怡)로 하여금 건주위(建州衛)의 오랑캐 이만주(李滿住)를 토벌하게 하니,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구선부(九獮府)의 제채(諸寨)를 격파하고 이만주와 그의 아들 고납합(古納哈)⋅타비랄(打肥剌) 등을 참수하였다. 성종(成宗)께서는 어유소와 윤필상(尹弼商)으로 하여금 오랑캐를 쳐서 격파하게 하였고, 그 후에 오랑캐들이 영안도(永安道)에 침입하여 진장(鎭將)을 죽였으나 허종(許琮)으로 하여금 2만 명의 병사들을 거느리고 가서 정벌하게 하여 크게 물리쳤고, 여러 도(道)에 성을 쌓고 병사들을 대대적으로 사열하였다. 중종(中宗)⋅명종(明宗) 때에는 오랑캐들이 변경 지역에 출몰하자 병사를 일으켜 쫓아내었다.

선조(宣祖) 초에는 오랑캐의 추장(酋長) 니탕개(尼湯介)가 6진에 출몰하므로 관작(官爵)을 주어서 우대하였는데, 그 후에 변방의 장수가 임지를 잘 다스리지 못하자 니탕개가 반역하여 경원(慶源)을 함락하였다. 이에 오운(吳沄)⋅박선(朴宣)을 조방장(助防將)으로 임명하여 용맹한 병사 8천 명을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게 하고, 정언신(鄭彦信)과 이용(李𢧳)이 경기 이하 5도의 병사들을 두루 징발하여 이르니, 온성 부사(穩城府使) 신립(申砬)이 오랑캐들을 내쳐서 크게 물리쳤다. 또 김의찬(金義贊)【부령 부사(富寧府使)】, 신상절(申尙節)【첨사(僉使)】 등과 더불어 두만강(豆滿江)을 건너 저들의 부락(部落)을 불시에 습격하여 크게 격파하였으나, 그 후로도 오랑캐들로 인한 근심은 끊이지 않았다.

일본(日本)에 대하여 성종께서는 신숙주(申叔舟)의 유언(遺言)을 따라 화친을 끊지 않았다. 중종 때에는 쓰시마 섬[對馬島]의 도주(島主) 소 요시모리[宗義盛]가 우리나라가 자신들의 사신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이유로 소 모리히로[宗盛弘] 로 하여금 병사 300명을 거느리게 하여 3포(浦)에 거류하고 있던 일본인과 힘을 합쳐 부산(釜山)의 제포(薺浦)를 노략질하고, 동래(東萊)를 포위하였으며, 웅천(熊川)【지금의 창원(昌原)】을 함락하였다. 그러나 곧 안윤덕(安潤德)과 황형(黃衡)⋅유담년(柳聃年)을 보내어 무력으로 평정하였으니, 이를 일컬어 삼포왜란(三浦倭亂)이라고 한다. 이때부터 쓰시마 섬과의 교류가 단절되었다가, 후에 다시 화호(和好)를 맺어 3포의 거류민을 폐지하고 오직 왜관(倭館)을 부산에 설치하여 사신을 접대하는 곳으로 삼았으나, 마침내 일본의 해적이 서남쪽 바닷가 지방을 침략하고 사량(蛇梁)에 들어가 노략질을 하였으므로 쓰시마 섬과의 교류가 끊어졌다가 명종 2년(1547)에 조약을 정하였다. 그러나 그 후에 또 왜선(倭船) 70여 척이 전라도에 침입하여 달량(達梁)을 함락하였다. 이에 이준경(李浚慶)⋅김경석(金景錫)⋅남치근(南致勤) 등을 보내어 토벌하니, 전주 부윤(全州府尹) 이윤경(李潤慶)이 힘을 다해 싸워 크게 이겼다. 이 해에 비변사(備邊司)를 설치하여 나라 안팎의 군사 기무를 모두 담당하게 함으로써 변경 지역을 방어하였다.

당시에 일본 변방의 사람들이 지나(支那) 해안가를 침략하는 일이 끊이지 않았고, 우리나라의 남해안 변경 지역에도 여러 차례 들어와 노략질을 하였는데, 해적과 다를 바가 없어서 잔인하게 약탈함이 극심하더니, 얼마 후에 임진(壬辰)의 난(亂)이 또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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