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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절 의용병(義勇兵)이 사방에서 일어나다

적이 바다를 건넌 후 파죽지세(破竹之勢)로 우리 관군(官軍)을 연달아 격파하고 3경(京)을 함락하여 전국을 유린하였으나, 일이 예기치 못하게 급박하게 발생하였으므로 백성들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여 근왕병(勤王兵)을 소집하여도 응하는 자가 없었다. 그러나 얼마 후에 의용병이 바람이 불고 물이 솟구치듯 일어나니, 뜻이 있고 어진 자의 의로운 피로써 20만 적병을 모두 물리쳤다.

이때에 영남(嶺南) 지역 사람인 곽재우(郭再祐)는 적이 바다를 건널 때에 집안의 재물을 모두 털어서 용맹한 장정들을 결집하고 병사들을 모았는데, 그 수가 수천 명에 달하였다. 적을 동⋅서에서 모두 격파하니 나아가는 길에 상대할 만한 적이 없었고, 상황의 변화에 적절히 대응함이 끝이 없었으며, 붉은 옷을 입고 적군의 진영을 드나듦이 번쩍번쩍하여 나는 듯하였으므로 탄환이 그를 맞추지 못하였다. 이에 적들이 말하기를 하늘이 내린 홍의장군(紅衣將軍)이라고 하면서 감히 범하지 못하였다.

적이 금산(錦山)에 거점을 두고 이리저리 날뛰자 초토사(招討使) 고경명(高敬命)이 방어사(防禦使) 곽영(郭嶸) 및 그의 아들 곽종후(郭從厚)와 더불어 7천 명의 군사들을 거느리고 가서 공격하다가 죽었다. 이에 의병장(義兵將) 조헌(趙憲)이 의승(義僧) 영규(靈圭)와 더불어 금산의 적을 치고자 하였는데, 권율(權慄)이 중지하라고 권하였으나 조헌이 노여워하면서 정예 병사 700여 명을 선발하여 금산으로 향하였다. 영규가 그에게 간언하기를, “관군(官軍)이 뒤를 이어 지원을 한 후에 들어가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자 조헌이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백성의 아버지와 같은 임금[君父]이 어디에 있는가? 군주가 치욕을 당하면 신하가 목숨을 바친다[主辱臣死]고 한 것이 바로 지금이다. 성공할지 실패할지, 영리한지 아둔한지는 알 바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그러고는 북을 치면서 진군하여 나가니 영규가 말하기를, “우리 조공(趙公)으로 하여금 어찌 혼자 죽게 하겠는가?”라고 하고는 곧 힘을 합쳐 공격하였다. 조헌이 명령을 내려 말하기를, “오늘은 오직 이 한 목숨을 바칠 뿐이다.”라고 하니, 장정들이 모두 동의하였다. 한참을 싸워서 화살이 다 떨어지고 힘이 고갈되자 조헌이 북을 쳐서 전투를 독려하니, 장정들이 모두 맨손으로 싸우다가 단 한 사람도 도망가는 자가 없이 모두 조헌과 함께 죽었다. 이때에 조헌은 비록 패하였지만 적병도 죽거나 다친 자들이 많아 퇴각하여 호남 지역이 다시 온전하게 되었다.

경상 병마절도사(慶尙兵馬節度使) 박진(朴晋)은 경주(慶州)에 침입한 적을 공격할 때, 비격진천뢰포(飛擊震天雷砲)를 직접 제작하여 성 안으로 쏘았는데, 그 포성(砲聲)이 천지를 뒤흔들고 철편(鐵片)이 별처럼 부서져 내려 죽거나 다친 적군이 매우 많았다. 적이 크게 놀라서 성을 버리고 도망치니, 이에 경주를 다시 되찾고, 적의 군량(軍糧) 1만여 석(石)을 습득하였다. 초토사 이정암(李廷馣)은 연안(延安)을 지키고 있었는데, 적군이 공격해 오자 정의감에 복받쳐서 무리에게 맹세하고 적을 활로 쏘니 백발백중(百發百中)이었다. 적이 온갖 방법으로 성을 공격한 지 4일 만에 힘이 다하여 쌓여 있는 시체를 불태우고 퇴각하자 이정암이 추격하여 가서 크게 격파하여 머리를 벤 적군의 수가 매우 많았다. 당시에 황해도[海西]가 모두 적에게 함락되었으나, 오직 연안만이 보존되어 서쪽으로는 행재소(行在所)1)왕이 궁궐을 떠나 멀리 거둥할 때에 임시로 머무르는 별궁(別宮)으로서 행궁(行宮)⋅이궁(離宮)이라고도 한다.까지, 남쪽으로는 호서(湖西) 지방에까지 이 소식을 전하게 하였다.

이보다 앞서 순화군(順和君)과 임해군(臨海君)이 근왕병을 소집하고자 하여 함경도에 들어갔는데, 회령(會寧) 사람인 국경인(鞠景仁)과 국세필(鞠世弼) 등이 두 왕자와 호종하던 신하 황정욱(黃廷彧)⋅황혁(黃爀) 등 수십 명을 잡아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에게 항복하니, 북쪽 경계 지역의 여러 성이 모두 적에게 함락되었다. 북평사(北評事) 정문부(鄭文孚)와 경원 부사(慶源府使) 오응태(吳應台)가 병사를 일으켜 강문우(姜文佑)⋅오윤적(吳允迪)⋅오준례(吳遵禮)⋅신세준(申世俊)⋅최배천(崔配天) 등과 더불어 국세필과 국경인을 참수하고, 남⋅북의 여러 주(州)에 격문을 보내 3천여 명을 모아서 가토 기요마사를 격파하여 600여 명의 머리를 베고 길주(吉州)로 나아가 포위하니, 가토 기요마사가 큰 곤경에 처하게 되어 길주를 버리고 퇴각하였다. 이에 정문부가 6진(鎭)을 순행하여 배반한 무리를 불러 달래니 북도(北道) 지방이 온전히 회복되었다.

진주(晋州)는 영남(嶺南)의 강성한 진이었으므로 적군이 조속히 함락하고자  수만 명의 병사들을 이끌고 와서 포위하였다. 그러나 목사(牧使) 김시민(金時敏)이 3천 명의 병사를 이끌고 죽을 힘을 다해 지키니, 적이 5일 만에 포위를 풀고 퇴각하였다. 얼마 후에 적군이 또다시 대거 공격하여 와서 포위하자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 등이 맞서서 9일 동안 100여 번을 싸워 적군을 죽인 것이 매우 많았으나, 끝내 적은 수로 많은 적군을 당해 내지 못하여 성이 함락되었다. 이에 김천일⋅최경회(崔慶會)⋅황진(黃進)⋅고종후(高從厚) 등이 북쪽을 향해 재배(再拜)를 올리고 강물에 몸을 던져 죽고, 이종인(李宗仁)⋅김준민(金俊民) 등도 또한 뒤따라 죽었으며, 성안의 남녀 백성들로 강물에 뛰어들어 죽은 자가 7만여 명에 달하였으니, 적의 침입으로 인한 변란이 일어난 이후로 패배의 비참함이 이와 같은 경우가 일찍이 없었다.

그 후에 적이 진주를 점거하였으나 관기(官妓) 논개(論介)가 적의 장수와 촉석루(矗石樓)에서 연회를 즐기다가 적의 장수를 안고 강물에 몸을 던져 죽었고, 평양(平壤)의 기생(妓生) 계월향(桂月香)은 의병장 김응서(金應瑞)와 힘을 합쳐 적군의 장수 고니시 히[小西飛]를 죽였으니, 이는 오랜 세월 흔치 않을 열렬한 정의로움이다.

김응서는 관서(關西) 사람으로 용맹한 무예가 매우 뛰어나서 의병(義兵)을 일으켜 여러 차례 큰 승리를 거두었고, 김덕령(金德齡)은 장사(壯士) 최담령(崔聃齡)과 더불어 5천여 명을 모집하여 적을 공격하였는데, 용맹하고 민첩하기가 나는 새와 같았기에 적들이 모두 두려워하며 굴복하였으나, 간신(奸臣)에 의해 무고를 당하여 억울하게 죽었으니, 지금까지도 세상 사람들이 분하고 한스럽게 여긴다.

정기룡(鄭起龍)은 영남에서 병사를 일으켜 적을 공격하였는데, 신령한 용맹함이 두드러져서 적진을 드나듦에 아무것도 거칠 것이 없는 듯하였고, 항상 적은 수의 군사로 적의 대군(大軍)을 격파하여 전후로 60여 번의 전투에서 모두 승리를 거두었다. 임중량(林仲樑)은 중화(中和)를 지킬 때에 적의 장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등이 갖은 방법으로 성을 공격하다가 패하여 도망갔고, 권응수(權應銖)⋅정인홍(鄭仁弘)⋅성윤문(成允問) 등은 영남에서 병사를 일으켜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었다. 적의 장수 사야가(沙也可)는 우리나라의 문물(文物)을 부러워하여 부하 3천 명을 거느리고 항복한 후 여러 차례 큰 공을 세웠으므로 왕이 성과 이름을 하사하여 김충선(金忠善)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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