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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절 권율(權慄)의 큰 승리와 이순신(李舜臣)의 위대한 업적

적이 금산(錦山)으로부터 웅치(熊峙)를 넘어 전주(全州)로 들어가려고 하였으나 김제 군수(金堤郡守) 정담(鄭湛)이 맞서 싸우다가 죽으니, 적군도 조금 물러났다. 얼마 지나서 적이 또다시 대거 병사를 일으켜 이현(梨峴)을 침범하자 전라 절제사(全羅節制使) 권율이 전투를 독려하였는데, 동복 현감(同福縣監) 황진(黃進)이 나무에 기대어 적에게 활을 쏘니 백발백중(百發百中)이었기에 해가 저물 때쯤 되자 적의 군사들이 크게 무너져서 엎드려 죽은 시체가 들에 가득 차고 흐르는 피가 개천을 이루었다. 이날 황진이 탄환에 맞아서 전세가 조금 꺾였으나, 권율이 병사들을 북돋아서 크게 승리하니, 이를 일컬어 이현 대첩(梨峴大捷)이라고 한다. 권율이 또 1만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양천강(陽川江)을 건너 고양(高陽) 행주(幸州)에 진을 쳤다. 적군이 공격하여 오자 권율이 여러 장수를 모아 놓고 말하기를, “적의 선봉이 매우 민첩하니 막아 내지 못할 것 같다. 오직 죽음으로써 나라에 보답하고자 한다.”라고 하고 여러 장수를 독려하여 죽을 각오로 싸웠다. 이때 권율이 직접 마실 것을 가지고 다니면서 목마른 자들에게 먹였으며, 묘시(卯時, 12시의 네 번째 시로서 오전 5시부터 7시)부터 유시(酉時, 오후 5시부터 7시)까지 적을 3번 쳐서 3번 모두 격파하였다. 또 여러 장수를 독려하여 칼을 들고 맞붙어 싸우니, 적이 크게 패하여 쌓인 시체가 산을 이루었다. 이를 일컬어 행주 대첩(幸州大捷)이라고 한다.

이보다 앞서 이순신이 전라 수사(全羅水使)로 있으면서 장차 왜(倭)의 침입이 있을 것을 알고는 쇠사슬로 진(鎭)의 입구를 가로막고 거북선[龜船]을 창조하여 전쟁 준비를 갖추었다. 거북선의 구조는 철판으로 둘러싸서 거북이의 등과 같았으며, 그 위에 십자(十字) 형태로 작은 길이 있어서 우리 병사들이 지나다니게 하고, 그밖에는 모두 날카로운 송곳을 줄지어 꽂았다. 앞머리에는 용머리를 만들어 그 입이 총구멍[銃穴]이 되었고, 뒷부분은 거북이의 꼬리로서 그 아래에 총구멍이 있었으며, 또 좌우에 각각 총구멍 6개가 있었다. 병사들이 그 아래에 숨어서 사방으로 포(砲)를 쏘니, 종횡(縱橫)으로 나아가고 물러남에 그 민첩하기가 나는 새와 같았다.

서력 1883년의 영국(英國) 해군(海軍) 기록에서 말하기를, “고려(高麗)의 전선(戰船)은 철판으로 선체를 둘러싼 것이 거북이 껍데기와 같아서 일본(日本)의 나무로 만든 병선(兵船)을 깨부수었으니,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철갑선(鐵甲船)은 진실로 조선(朝鮮) 사람이 처음 만든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이순신의 거북선과 박진(朴晋)의 비격진천뢰포(飛擊震天雷砲)는 진실로 세계에서 특출한 것이며, 오랜 세월을 통하여 처음 있는 것이었다.

또 왜적(倭賊)이 침입하자 경상 수사(慶尙水使) 원균(元均)이 이순신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이순신이 수군[舟師]을 거느리고 가서 군사들에게 맹서하기를, “오늘은 오로지 적을 공격하다가 죽어야 할 것이다.”라고 하고는 옥포(玉浦)로 나아가 적선(賊船) 30여 척을 크게 격파하고, 또 노량(露梁)으로 나아가다 적을 만나 큰 전투를 벌였다. 이때 왼쪽 어깨에 탄환을 맞았으나, 활을 놓지 않고 하루 종일 전투를 독려하여 적선 13척을 격파하여 침몰시켰다. 그 후에 당포(唐浦)에서 큰 전투를 벌여 적의 장수를 활로 쏘아 죽이고 적선을 모두 불태웠으며, 또 전라 수사 이억기(李億祺)와 더불어 고성(固城) 전포(前浦)에서 적의 장수를 쏘아 죽이고 적선 30여 척을 크게 격파하니, 군사들의 함성이 크게 진동하였다. 그 후에 적이 또 호남(湖南) 지역을 향하므로 이순신이 이억기와 더불어 진격하다가 적을 고성 견내량(見乃梁)에서 만났는데, 항구가 수심이 얕고 좁아서 마음껏 싸우지 못할 듯하였다. 이에 거짓으로 패한 체하여 적을 한산도(閑山島) 앞바다로 유인하다가 군사를 돌려 적선 70여 척을 섬멸하니, 적의 장수 우키다 히다이에[平秀家]는 혼자 도망하고 적군으로서 죽은 자가 수만 명에 이르렀으며, 함포의 연기가 하늘을 가득 채우고 피비린내가 바다에 가득 찼다. 적의 구원병이 다시 이르자 이순신이 안골포(安骨浦)에서 분격하여 크게 물리쳐 적선 40여 척을 불태우고 적병 9천여 명을 죽이고, 부산(釜山)에 침입한 적을 향해 진격하여 적의 근거지를 소탕하고자 하였는데, 적이 달아나 버려서 마침내 빈 적선 100여 척을 불태우고 돌아왔다. 조정에서 이순신을 통제사(統制使)로 임명하여 한산도를 지키게 하니, 위엄스레 우뚝 솟은 남해(南海)의 장성(長城)이 되어 적이 감히 침범하지 못하였다.

원균이 이순신의 공을 시기하였으므로 그를 무고하여 병권(兵權)을 빼앗고 통제사를 대신 맡아 이순신의 정책을 모두 바꾸니, 군졸들이 원망하여 그의 호령을 따르지 않다가 적의 장수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와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 등에게 패하여 죽었다.

원균이 패배하고 적이 상륙하여 남원(南原)을 함락하자 조정에서 크게 놀라 이순신을 다시 통제사로 임명하여 가서 방어하게 하니, 이순신이 혼자 말을 타고 순천부(順天府)에 이르러 흩어진 병졸 수백 명과 병선 수십 척을 수습하여 적병을 어란도(於蘭島)에서 크게 격파하였다. 또 적선 수백 척이 습격하여 왔는데, 이순신이 병사들의 수가 적은 것을 걱정하여 피난민을 태운 배 수백 척을 뒤쪽에 포열한 후 소리를 질러 응원하게 하고, 홀로 전선 10여 척을 이끌고 진격하여 적을 진도(珍島) 벽파정(碧波亭) 아래에서 크게 격파하여 적의 명장(名將) 구루시마 미치후사[馬多時]를 참수하니, 군사들의 함성이 크게 진동하였다.

그 후에 명(明)나라 장수 진린(陳璘)과 더불어 적을 노량에서 맞아 싸웠는데, 밤부터 아침이 되기까지 수십 번의 전투를 벌여 모두 크게 승리하였다가 끝내 날아오는 탄환에 맞아 죽었다. 그러나 그의 조카 이완(李莞)은 이순신의 죽음을 알리지 않고 전투를 독려하기를 전과 같이 하여 마침내 적을 섬멸하였다.

이순신은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며, 정치가 어지러워 어찌 할 도리가 없는 시대에 태어나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척수공권(隻手空拳)의 처지로 능히 10만의 적병을 불씨 하나로 모두 불태우고, 수천여 척의 적선을 한 손으로 다 깨부수어 어린아이와 같은 일본의 흉악한 불꽃을 꺼뜨리고 부여족(扶餘族)의 영광에 공헌하였으니, 동서고금(東西古今)에 그와 같은 자가 또한 누가 있겠는가? 세상에 비할 바 없는 간교한 영웅 나폴레옹[拿破崙]의 백만 대군을 한 번에 섬멸하여 지중해(地中海)의 물귀신이 되게 한 넬슨[奈爾遜]이나 되어야 혹시 겨루어 볼 수 있을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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