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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근고사(近古史) - 제3편 학문의 부흥과 무예 쇠퇴의 시대[文興武衰時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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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장 종교와 문학

유교(儒敎)는1)원문에는 17장으로 되어 있으나, 18장으로 바로잡는다. 고려(高麗) 충렬왕(忠烈王) 때에 안유(安裕)가 이 학문을 부흥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아서 대성전(大成殿)을 세워 공자(孔子)를 제사 지냈고, 우탁(禹倬)은 『주역(周易)』을 깊이 이해하였다. 충숙왕(忠肅王) 때에는 백이정(白頤正)이 원(元)나라에 가서 성리학(性理學)[程朱學]을 배우고 귀국하자 이제현(李齊賢)⋅박충좌(朴忠佐) 등이 그를 좇아 배웠고, 권부(權溥)는 주자(朱子)의 『사서집주(四書集註)』를 간행하였으니, 이에 성리학이 점점 성행하였다. 정몽주(鄭夢周)가 또한 문장의 기개와 절의, 성리 도학(性理道學)에 정통함으로써 한 시대의 으뜸이 되었고, 윤언이(尹彦頤)는 『역해(易解)』를 저술하였으며, 권근(權近)은 『입학도설(入學圖說)』과 『오경천견록(五經淺見錄)』 등을 저술하고 그 문하에서 박상충(朴尙衷)⋅길재(吉再) 등을 배출하여 성리학을 고취하였다. 당시에 불교(佛敎)가 비록 성행하기는 하였으나 유교도 또한 더욱 발달할 전망이 보였다. 우리 왕조에 이르러 세종(世宗)께서 유교를 더욱 장려하시고, 성종(成宗) 때에는 김종직(金宗直)의 문장과 도학(道學)이 당시에 제일로 꼽혔으며,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 등 수십 명이 모두 그의 문하에서 공부하여 유교의 학풍이 점점 떨치게 되었다. 조광조(趙光祖)는 김굉필의 문인으로 도학이 심오하고 덕행(德行)이 남들보다 뛰어나 부드러운 바람과 단 비[和風甘雨]와 같은 기상이 있었고, 중종(中宗)을 보좌하여 온 세상을 구제하고자 하다가 불행하게도 간신(奸臣)들에게 무고를 당하여 억울하게 죽었다. 이황(李滉)은 성리학을 닦으면서 또한 몸소 실천하여 정자(程子)와 주자의 정수를 얻었으며, 현묘한 이치에 밝게 통달하여 당시 사람들이 모두 그를 숭배하였다. 이이(李珥)는 또한 성리학의 깊고 오묘함을 꿰뚫어 정자와 주자가 미처 펴지 못한 이치를 밝혀 내고, 『성학집요(聖學輯要)』와 『격몽요결(擊蒙要訣)』 등의 서적을 저술하였다. 또한, 조정에 나아가 벼슬하여 권신(權臣)들의 세도(世道)를 바로잡고자 하다가 당시의 형편이 여의치 못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으니, 조광조⋅이황⋅이이 3인은 진실로 500년 역사에서 가장 추앙받던 유학의 스승이었다고 하겠다.

명종(明宗) 때의 서경덕(徐敬德)⋅조식(曺植)2)원문에는 조식(曹植)으로되어 있으나, 조식(曺植)으로 바로잡는다.⋅이언적(李彦迪)⋅성수침(成守琛)⋅기명언(奇明彦)은 모두 한 시대의 어진 인재로서 유교를 드러내서 밝혔다[闡明]. 선조(宣祖) 때의 성혼(成渾)⋅송익필(宋翼弼)은 모두 이이와 가깝게 지내며 도학을 강론하였다. 그 후에 김장생(金長生)⋅김집(金集)⋅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俊吉) 등이 배출되자 성리학[程朱學]이 더욱 성행하고, 정권과 풍습의 교화가 모두 유교도(儒敎徒)의 손에 있게 되었다. 그러나 장자(莊子)⋅노자(老子)와 육구연(陸九淵)⋅왕수인(王守仁)의 학문을 언급하는 자는 이단(異端)이라고 하여 곧장 배척하였으며, 점차 정자⋅주자의 의견과 합치하지 않으면 곧 성리학의 교리를 어지럽히고 그 사상에 어긋나는 사람[斯文亂賊]이라고 하여 그 사람을 죄를 물어 죽이고 그 말과 글을 모두 불태워 없애 버렸다. 숙종(肅宗) 때에 윤휴(尹鑴)의 학식이 심오하여 사서(四書)의 주해(註解)를 개정하였는데, 주자의 논의와 자못 일치하지 않았으므로 송시열이 당쟁으로 인하여 윤휴를 증오하다가 이 저술을 보고는 사문난적으로 무고하여 죽이고 그 인쇄판을 훼손하였다. 이때부터 이것이 버릇이 되어 한마디라도 선현(先賢)과 합치하지 않으면 곧 전국의 유림(儒林)이 들고 일어나 성토하여 죄를 물어 죽여 버렸다. 이 때문에 비록 권상하(權尙夏)⋅윤증(尹拯)⋅한원진(韓元震)⋅이재(李縡)⋅이간(李柬) 등의 큰 인물들이 배출되었기는 하지만, 진정한 유교의 면목은 다 없어지고, 다만 붓과 혀를 놀려 자신에게 부회하는 자를 찬양하고, 자신과 입장을 달리하는 자를 배척하기만 일삼았다. 끝내는 호(湖)【한원진의 파(派)】와 낙(洛)【이간의 파】의 당파(黨派)가 분열하여 경쟁이 더욱 격렬하였으나, 그 학설은 옛사람의 찌꺼기만을 겨우 고수하면서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법문을 세워 사상과 언론(言論)을 독점함이 심하였으니, 비단 사회가 어두워졌을 뿐만 아니라 유교도 또한 쇠퇴하고 문란해져서 겉모습은 비록 번성하는 듯하여도 실제로는 부패하여 부진하였다. 더욱 행실이 비루한 자는 ‘중화(中華)를 받들고 오랑캐를 배척한다[尊華攘夷]’고 하는 뜻을 잘못 이해하여 조국을 비루하게 여기고 지나(支那)를 숭배하였으며, 사대주의(事大主義)를 고취하여 백성들의 뇌리(腦裏)에 노예 근성을 주입하여 나라의 기세가 풀이 죽어 떨쳐 일어나지 못하게 하였으니, 어찌 탄식할 만한 일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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