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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15년(1637)

다음 해(1637) 봄 정월에 강도(江都, 강화도)가 함락되어 유수(留守) 장신(張伸)과 검찰사(檢察使) 김경징(金慶徵)은 몸을 피해 홀로 도망가고, 김상용(金尙容), 심현(沈俔), 홍명형(洪命亨), 이시직(李時稷), 이상길(李尙吉), 송시영(宋時榮), 윤전(尹銓), 정백형(鄭百亨), 권순장(權順長), 김익겸(金益謙), 김수남(金秀男), 민성(閔垶), 이돈오(李惇五), 이가상(李嘉相) 등은 모두 죽었다. 30일에 최명길(崔鳴吉)이 주화(主和)를 주장하여 청(淸)과 강화를 맺게 되었다. 왕께서 한양(漢陽)으로 돌아오신 후 “병란(兵亂)은 안정될 수 있는 기일이 있지만 붕당(朋黨)은 안정될 수 있는 기일이 없다. 선조(宣祖)께서 용만(龍灣, 의주의 별칭)에 행차하여 시 한 수를 지었는데, 그 시에 ‘용만의 달에 통곡하고, 압록강 바람에 마음 상하네. 조정 신하가 금일 이후에, 어찌 다시 서인(西人), 동인(東人)을 찾을 것인가.’ 하셨다. 신하 된 자가 그 시를 보았는데도, 폐습(弊習)은 날로 심해지니, 세도(世道)가 또한 개탄스럽다.”라고 하셨다. 세자와 봉림 대군(鳳林大君)은 심양(瀋陽)에 [인질로 끌려가] 8년 동안 머무르시다 돌아오시고, 학사(學士) 홍익한(洪翼漢), 오달제(吳達濟), 윤집(尹集)은 척화(斥和)를 주장하였다는 이유로 청에서 해를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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