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대 국사 교과서
  • 개화기 및 대한제국기
  • 국조사
  • 광해군(光海君)-순종(純宗)
  • 경종조(景宗朝)
  • 경종 원년(1721)

경종 원년(1721)

신축 원년(辛丑元年, 1721)에 왕의 옥체가 편찮으시고 저위(儲位, 왕세자 자리)가 비어 있으므로 정언(正言) 이정소(李廷熽)가 왕세자를 세울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왕께서 대신들에게 이에 대하여 논하라고 명하셨다. 영상(領相) 김창집(金昌集), 좌상(左相) 이건명(李健命), 판중추(判中樞) 조태채(趙泰采)가 “대간의 말이 종묘와 사직을 [보존하는] 좋은 계책입니다.”라고 아뢰었다. 왕께서 왕대비(王大妃)【숙종(肅宗) 인원 왕후(仁元王后) 김씨(金氏)】의 처소에 들어가셔서 말씀하셨다. [이를 들은] 대비께서는 ‘연잉군(延礽君)’【영조(英祖)】이라는 세 글자를 종이에 적으신 후 “효종 대왕(孝宗大王)의 혈맥(血脈)과 선대왕(先大王)의 골육(骨肉)은 주상(主上)과 연잉군뿐이다.”라고 하셨다. 이에 왕께서 연잉군을 왕세제(王世弟)로 책봉하셨다. 사직(司直) 유봉휘(柳鳳輝)가 상소로 올린 말이 흉측하고 어지러웠기에【“하늘에는 두 개의 태양이 없다.”라거나 “천위(天位)를 몰래 움직이려 한다.”는 등의 말이었다.】 그를 멀리 유배 보냈다. 집의(執義) 조성복(趙聖復)이 상소로 청한 말에 따라 왕세제로 하여금 정령(政令)을 재결하는 것을 참여하여 듣게 하다가 최석항(崔錫恒)이 아뢴 말에 따라 다시 중지하도록 명하였고, 다시 3일이 지난 뒤 엊그제 하교했던 대로 다시 거행하라고 하셨다. 이에 왕세제가 다섯 번 소장을 올려 굳이 사양하셨고, 김창집 등도 명령을 거두시기를 청하셨다. 왕께서 “한편으로는 나의 병을 조리할 수 있도록 하고, 한편으로는 장차 망하려는 [국가를] 지탱하기 위함이다.”라고 하시니 김창집 등이 정유(丁酉)【경종(景宗)이 정치에 참여한 해】에 시행했던 절목(節目)만을 따라 거행하도록 청했는데, 조태구(趙泰耉)가 있는 힘껏 가로막는 바람에 일이 끝내 시행되지 않았다. 내시 박상검(朴尙儉)과 문유도(文有道), 궁비(宮婢) 석렬(石烈)과 필정(必貞)이 김일경(金一鏡) 등과 함께 동궁(東宮)을 위해하려고 모의하였다는 이유로 복주(伏誅)하였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