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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황제 37년(1900)

다음 해(1900) 봄 1월에 일본 사람들에게 고래 잡는 것을 특별히 허락하였다.

여름 4월에 찬정(贊政) 이하영(李夏榮)을 특파 대사(特派大使)로 임명하시어 일본(日本) 황태자 혼례(婚禮)에 참석하도록 하였다. 외국으로 망명한 사람【황태자 대리청정의 일을 모의】 전(前) 군부 대신(軍部大臣) 안경수(安駉壽)와 전 경무사(警務使) 권형진(權瀅鎭)이 일본으로부터 돌아와 평리원(平理院)에 죄가 없음을 자수(自首)하였는데, 경무사 이유인(李裕寅)이 그들을 살해하였다.

가을 9월에 내장원 경(內藏院卿) 이용익(李容翊)의 주청에 따라 각 도에 있는 역둔토(驛屯土)를 내장원으로 옮겼다. 이기선(李基善)과 임병길(林炳吉)이 폭발약(爆發藥) 사건의 고영근(高永根), 최정덕(崔廷德) 등과 관련이 있었기 때문에 교수형에 처하였다.

겨울 10월 울릉도(鬱陵島)를 울릉군(鬱島郡)으로 바꾸었다. 경상도와 전라도 연해(沿海)의 각 군에서 활빈당(活貧黨)이 일어나 부민(富民)을 토색(討索)하였다. 이에 원수부(元帥府)에서 병사 1백 명을 선발해 보내 그들을 토벌하게 하였다. 선원전(璿源殿)에 화재가 발생하였기 때문에 태조(太祖)의 어진(御眞)을 함흥(咸興)에 위치한 본궁(本宮)에서 받들고 옮겨 와 모사하였다. 장충단(獎忠壇)을 설치하여 갑오(甲午) 이후 순절한 홍계훈(洪啓薰), 이경식(李耕稙) 등과 전쟁에서 죽은 장졸(將卒)들을 제사하였다.

11월에 궁내부(宮內府) 외사과(外事課)를 예식원(禮式院)으로 바꾼 뒤 민영환(閔泳煥)을 원장(院長)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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