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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황제 41년(1904)

갑진 8년(甲辰八年, 1904)에 일본과 러시아[日俄]의 교섭이 결렬되었기 때문에 각국이 공관(公館) 보호병(保護兵)을 파견하여 수도로 들어왔다. 일본과 러시아의 상호 대립으로 인하여 용암포(龍巖浦)를 개방하고, 러시아[俄國]가 그 세력을 우리 대한 제국 및 만주(滿洲)로 확장하고자 하였다. 이에 일본이 이웃 나라의 강토를 보전하도록 도와준다는 선전서(宣戰書)를 공포하고, 러시아 군함을 인천(仁川) 앞바다에서 격파(擊破)하였다. 러시아 장군은 전함을 불태운 후 스스로 자결하고, 러시아 공사(公使) 파블로프[巴禹路厚, A. Pavloff]1)원문에는 구로후(區路厚)로 되어 있으나, 『고종실록』에 의하면 파블로프[巴禹路厚]이므로 바로잡는다.는 군사를 철수하여 본국으로 돌아갔다.

봄 2월에 한일 의정서 6조가 체결되었다.

3월에 일본 군사가 러시아 군대를 평양(平壤)과 의주(義州)로 추격하여 격파하였다. 일본 특파 대사(日本特派大使)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왔다. 이지용(李址鎔)을 보빙 대사(報聘大使)로 임명하였다.

가을 8월에 윤시병(尹始炳), 송병준(宋秉畯), 유학주(兪學柱) 등이 일진회(一進會)를 조직하였다.

겨울 10월에 일본인 메가타 다네타로[目賀田種太郞]를 재정 고문(財政顧問)으로, 미국인(美國人) 스티븐스[須知分, Stevens, D.W.]를 외부 고문(外部顧問)으로 초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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