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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황제 즉위년(1907)

정미 즉위년(丁未卽位年, 1907)1)원문에는 원년(元年)으로 되어 있으나, 『순종실록』에 따르면 정미년(1907)은 순종의 즉위년(卽位年)이므로 바로잡는다. 8월 2일에 연호를 바꿔 융희(隆熙)라 하였다. 태상황부(太上皇府)의 호(號)는 승녕(承寧), 궁호(宮號)는 덕수(德壽)라 하였다. 태상황의 셋째 아들 영친왕(英親王)【이은(李垠)】을 황태자(皇太子)로 책봉하셨다. 박영효(朴泳孝), 유길준(兪吉濬), 장박(張博), 조희연(趙羲淵) 등이 일본(日本)으로부터 조선(朝鮮)으로 돌아왔다. 박영효를 궁내대신(宮內大臣)으로 삼았는데 선위(禪位) 일에 중립(中立)하여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기 때문에 제주도(濟州島)에 안치(安置)하였다. 27일에 즉위 예식(卽位禮式)을 돈덕전(惇德殿)에서 행하셨다. 일본인 소네 아라스케[曾禰荒助]2)원문에는 소네 아라스케[曾彌荒助]로 되어 있으나, 소네 아라스케[曾禰荒助]로 바로잡는다.가 부통감(副統監)에 임명되어 통감(統監)을 보좌하였다. 각부 협판(協辦)을 차관(次官)으로 하여 일본인으로 임명하였다. 조사국(調査局)을 설치하여 국가 소유 재산과 황실 소유 재산을 기록한 장부를 정리하고 인민(人民)들이 소유한 사적 재산들을 돌려주었다.

10월 17일에 일본의 황태자가 바다를 건너와 우리 조선의 황태자를 일본에 유학(留學)시킬 것을 상에게 청하고 5일 후에 일본으로 돌아갔다.

12월 13일에 상이 창덕궁(昌德宮)으로 옮겨 가셔서 사직(社稷)에 서고(誓告)하셨다. 대사면을 행한다는 조서를 내리셔서 개국 이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죄인이 된 이들을 모두 사면해 주셨다. 강원도 원주(原州) 진위대정교(鎭衛隊正校) 민긍호(閔肯鎬)가 병사를 일으켜 그 세력이 점점 커졌다. 황태자께서 일본으로 바다 건너가실 때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태자 태사(太子太師)로 삼고, 궁녀 16명을 명신 여학교(明新女學校)에 입학하게 하였다. 이보다 먼저 신사(紳士) 등이 자강회(自强會)를 조직하였으나 치안(治安)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해산하게 하였는데, 후에 대한 협회(大韓協會)로 조직을 바꿨다. 그 밖에 흥사단(興士團)과 각 학회들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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