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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원전 222년 경인 [의종 24년]

기원전 222년 경인 [의종 24년]

왕이 화평재(和平齋)에 행차하여 가까이 총애하는 문신들과 술 마시고 시를 읊으며 돌아갈 줄을 몰랐는데, 호종하는 장사(將士)들은 심하게 굶주렸다. 견룡 산원(牽龍散員) 이의방(李義方)과 이고(李高) 등이 상장군(上將軍) 정중부(鄭仲夫)에게 말하기를, “문신은 취하고 배부른데 무신은 굶주리고 피곤하니 이 어찌 참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정중부는 일찍이 김돈중(金敦中)에게 수염을 태운 원한을 갖고 있었다. 【인종 때 김돈중이 과거에 장원 급제하고 내시(內侍)에 소속되었는데 나이는 어리지만 기백이 날카로웠다. 대궐 뜰에서 나례(儺禮)를 행하는 저녁에 촛불로 정중부의 수염을 태웠는데 정중부가 진노하여 김돈중을 때리고 욕설을 퍼부었다. 김돈중의 아버지 김부식이 주청하여 정중부를 고문하여 다스려줄 것을 청하였으나, 왕이 정중부의 사람됨을 비상히 여겨서 몰래 도피시켜 모면하게 하였다. 정중부는 이로 말미암아 김돈중에게 깊은 원한을 품게 되었다.】 이에 비밀리에 흉모를 꾸미고 말하기를, “왕이 만약 보현원(普賢院)으로 옮겨가면, 그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다.

왕은 무신들이 불만을 품고 있는 것을 알고 수박희(手搏戱)를 추게 하고 후하게 상품을 내림으로써 위로해 주려고 하였다. 한뢰(韓賴) 등은 무신들이 왕의 총애를 받는 것을 시기하여 대장군 이소응(李紹膺)이 수박희에서 이기지 못하자 뺨을 때리며 욕설을 퍼부었다. 왕과 이복기(李福基)·임종식(林宗植) 등이 따라서 즐겁게 웃었다. 정중부가 소리를 높여 말하기를, “이소응이 비록 무부(武夫)이지만 관계(官階)가 3품인데 어찌 그리 심하게 욕합니까?” 하자, 왕이 위로하며 풀어주었다.

어가가 보현원에 가까워지자 이고와 이의방이 왕의 교지라고 속이고 순검군(巡檢軍)을 모이게 하고, 왕이 막 문으로 들어가자 이고 등이 문에서 임종식과 이복기를 직접 죽였다. 한뢰가 달아나 왕의 침상 밑에 숨어 어의(御衣)를 끌어당기자, 이고가 칼을 빼서 협박하여 끌어내어 베어 죽였다. 이에 호종하는 문관과 여러 환시(宦侍)들을 대학살하니 시체가 산처럼 쌓였다. 【처음 정중부 등이 약속하기를, “우리들은 오른쪽 소매를 걷어 올리고 복두(幞頭)를 벗는다."라고 하였으므로, 무신으로 복두를 벗지 않은 자들 역시 많이 피살되었다.】

이고·이의방·이소응 등이 날쌔고 용감한 사람을 골라 곧장 대궐로 들여보내 추밀사(樞密使) 양순정(梁純精) 등 10여 명을 죽였다. 또 태자궁에 가서 소속 관리 10여 명을 죽이고 길에서 소리치기를, “문신의 관을 쓴 자는 비록 서리(胥吏)라 하더라도 남김없이 죽여라.”고 하니, 졸개들이 이때를 틈타 봉기하여 평장사 최부칭(崔裒稱)·허홍(許洪), 지추밀(知樞密) 서순(徐醇)·최온(崔溫), 상서 승(尙書丞) 김돈시(金敦時), 대사성 이지심(李知深) 등 50여 명을 찾아 죽였다.

마침내 군사를 동원하여 왕을 협박하여 궁궐로 돌아가도록 하였다. 환관 왕광취(王光就)가 모의하여 정중부를 토벌하려 하였으나 일이 새어나가 또다시 내시와 환관 수십 명을 대학살하였다. 당시 왕의 총애를 받은 사람들을 처참하게 베어 죽여 목숨을 부지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는데 왕은 음악을 연주하며 술을 마시며 태연자약하였다. 정중부가 왕을 군기감(軍器監)으로 옮기고, 태자는 연은관(延恩館)으로 옮겼다.

바야흐로 난이 일어나자 문신 가운데 비록 살육은 면하였더라도 많은 사람이 구금되어 욕을 당하였는데, 오직 전 평장사 최유청(崔惟淸)·서공아(徐恭雅)는 무신들의 존경을 크게 받았기 때문에 화를 면하였다. 김돈중은 도망가 감악산(紺嶽山)에 숨어 있다가 정중부가 포상금을 걸어 잡아 죽였다.

○ 정중부 등이 왕을 핍박하여 거제(巨濟)로 보내고, 태자는 진도(珍島)로 추방하였다. 왕의 동모제인 익양공(翼陽公) 호(皓)를 옹립하였다.

○ 사신을 금나라에 파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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