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대 국사 교과서
  • 개화기 및 대한제국기
  • 조선역대사략 권2
  • 고려기(高麗紀)
  • 위주(僞主) 우(禑)
  • 기원전 4년 무진 [우왕 14년]

기원전 4년 무진 [우왕 14년]

명나라가 동북면에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하겠다고 통고하였다. 【황제가 철령 이북은 본시 원나라에 속했던 것이므로 모두 요동(遼東)에 귀속시키겠다고 사신을 보내 통고하였다.】

○ 우가 병력을 출동시켜 평양(平壤)에 머무르며 요동 정벌을 독려하였다. 【명나라가 처음 일어나자 이인임(李仁任)과 지대연(池大淵) 등은 원나라를 섬기자고 주장하고, 정도전(鄭道傳)과 박상충(朴尙衷) 등은 명나라를 섬길 것을 주장하였다. 최영(崔瑩)이 권력을 잡음에 이르러 원나라를 섬기자는 의론을 이끌었다. 이때에 이르자 명나라가 철령위를 세우고 관참(官站)을 설치하니, 최영은 우왕에게 책략을 세워 요동을 정벌할 것을 권유하였다. 태조 대왕이 그 불가함을 아뢰었으나 우왕은 듣지 않았다. 최영을 팔도 도통사(八道都統使)로 삼고, 조민수(曺敏修)를 좌군 도통사(左軍都統使)로 삼고, 태조 대왕을 우군 도통사(右軍都統使)로 삼아 모든 군사를 출동시켰다. 최영은 우왕과 함께 평양에 머물러 밤낮으로 마음껏 즐겼다. 그 때 태조 대왕의 공명(功名)이 성대한 데다 또 이씨(李氏)가 왕이 된다는 참언이 있었기 때문에 최영은 태조 대왕을 매우 꺼렸다. 그리하여 상국(上國)에 죄를 짓게 하여 제거하고자 이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 홍무(洪武) 연호를 정지하고, 나라 사람들에게는 다시 호복(胡服)을 입도록 명하였다.

○ 대동강 물이 붉고 탁하였다.

○ 우리 태조 대왕이 좌우 모든 군사를 거느리고 위화도(威化島)에서 돌아오자, 우왕이 경성(京城)으로 돌아왔다. 【좌군과 우군이 압록강을 건너 나아가 위화도에 주둔하였다. 태조 대왕이 장사(將士)들에게 역순 화복(逆順禍福)으로 설득하여 마침내 회군하였다. 그 때 장마 비가 며칠 계속 내렸는데 물이 불어나지 않다가 군사들이 이미 다시 건너오자 큰물이 갑자기 쏟아져 내려와 온 섬이 물에 잠겼다. 사람들이 이를 신기하게 여겼다. 우왕은 회군 상황을 듣고 최영 등과 함께 말을 달려 경성으로 돌아왔다. 황제는 우왕이 군사를 일으켰다는 것을 듣고 정벌하려 하였다가 회군 소식을 듣고는 곧바로 그만두었다.】

○ 최영을 유배하였다. 【태조 대왕이 모든 군사를 이끌고 와서 근교에 주둔하면서 글을 올려 최영의 죄를 열거하고 죄를 줄 것을 청하였다. 우왕이 따르지 않자, 곽충보(郭忠輔) 등이 직접 궁전 마당에 들어가 최영을 찾아내 유배하였다.】

○ 홍무 연호를 다시 시행하고, 호복(胡服)을 금하였다.

우왕을 강화(江華)로 내쫓고 우왕의 아들 창(昌)을 옹립하였다. 【태조 대왕은 왕씨를 가려 뽑아 즉위시키려 하였다. 후에 조민수(曺敏修)는 창을 즉위시키고자 하였으나, 여러 장수들이 자기 뜻을 어길까 두려워하였다. 이에 이색(李穡)이 당시 명망 있는 유학자였기 때문에 그의 말을 빌려 보려고 비밀리 물어 보았다. 이색이 말하기를, “마땅히 전왕의 아들을 옹립해야 합니다.”라고 하자, 조민수 등이 정비(定妃)의 교지로써 창을 옹립하였다. 당시 나이 9세였다. 창은 우의 아들이다.】

○ 우리 태조 대왕을 수시중(守侍中)으로 삼았다.

○ 최영(崔瑩)을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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