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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왕의 사적(事蹟)

고국원왕(故國原王)부터 소수림왕(小獸林王), 【제17대】 고국양왕(故國壤王) 【제18대】 을 거쳐, 광개토왕(廣開土王) 【제19대】에 이른다. 광개토왕이 즉위한 것은 닌토쿠 천황 시대 말기에 해당한다. 광개토왕의 이름은 담덕(談德)이라고 하며 매우 용맹한 사람이었다. 이 왕과 그의 아들인 장수왕(長壽王)의 재위 기간은 중국의 혼란이 더없이 심한 시기였기 때문에, 점점 더 반도의 땅을 빼앗아 그 영토를 넓힐 수 있게 되었다.

광개토왕이 친히 사방을 공격하여 국토를 크게 확장한 것은, 현재의 만주 【성경성(盛京省) 집안현(輯安縣)】에 있는 광개토왕의 비문에 나타나 있다. 이에 의하면 왕은 주로 백제와 더불어 그를 도운 일본과 싸웠다. 최근의 고증(考證)에 의하면 이 왕 시기에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의 경계는 임진강 유역과 한강 유역의 중간에 있었던 것 같은데, 『삼국사기』에는 백제 진사왕(辰斯王) 【제16대】 본기에, “8년 가을 7월에, 고구려 왕 담덕(談德)이 통솔하는 병사 4만 명이 북비(北鄙)를 공격해 와, 석현(石峴) 등 10여 개 성들을 함락시켰다. 왕은 담덕이 군대를 이용하는 데 능하다는 말을 듣고, 나아가 막을 수 없었으니, 한수(漢水) 북쪽의 여러 부락들을 빼앗겼다. 【진사왕 8년은 광개토왕 원년이다.】 ”라고 되어 있으므로, 백제는 한강 이북에 있는 영토를 이때 많이 잃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강원도에 있던 예족(濊族)도 광개토왕 이전부터 고구려에 복속되었으므로, 그 영토는 신라와 인접하게 되었다. 때문에 이 왕 때 신라는 볼모를 보내 고구려와 우호를 맺었다. 『삼국사기』의 신라 내물왕(奈勿王) 【제17대】 본기에는 “37년 봄 정월에, 고구려가 사신을 보냈다. 왕은 고구려가 강성했으므로 이찬(伊湌) 대서지(大西知)의 아들 실성(實聖)을 볼모로 보냈다.” 【내물왕 37년은 광개토왕 원년이다.】 라고 되어 있다. 광개토왕은 재위 22년, 나이 39세에 세상을 떠났다. 이때가 인교(允恭) 천황 【제19대】 2년 【동진(東晉) 안제(安帝) 의희(義熙) 9년】 이다. 이듬해에 그를 산속의 능(陵)에 옮겨 매장했다. 집안현(輯安縣)에 현존하는 이 왕릉비(王陵碑)는 이 해로부터 가능한 오래지 않아 만들어졌을 터인즉, 실로 지금으로부터 1500여 년 전으로, 그 비문은 곧 당시의 문장으로 되어 있으므로, 매우 믿을 만한 가치가 있는 사료(史料)이다. 광개토왕이라는 호칭은 앞에서 기록한 비문에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라고 되어 있다. ‘국강상(國岡上)’은 왕을 매장한 지명이고, ‘광개토경평안호태(廣開土境平安好太)’는 그의 큰 업적[鴻業]을 일컫는 말이다. 호칭이 너무 길기 때문에 보통 줄여서 ‘광개토왕’ 또는 ‘호태왕’이라고 부르며, 고구려에서는 그때의 연호(年號)에 따라 ‘영락대왕(永樂大王)’이라고 존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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