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대 국사 교과서
  • 일제강점기
  • 심상소학국사보충교재 교수참고서 - 1
  • 11. 고려 4
  • 비고(備考)
  • 이성계 등의 위화도 회군부터 고려 멸망까지의 사정

이성계 등의 위화도 회군부터 고려 멸망까지의 사정

공민왕이 환관에게 시해되어 후계의 문제가 발생하지만 시중(侍中) 이인임(李仁任)이 많은 사람의 의견을 뿌리치고 우(禑)를 옹립한다. 왕은 이때 나이가 고작 10세였다. 이인임은 왕을 옹립한 공으로 정권을 전횡하여, 정몽주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명나라를 배척하고 원나라와 친해진다는 방침을 취했다. 당시 왜구를 방어하는 등의 무공(武功)으로 이름을 떨친 것은 최영(崔瑩)과 이성계(李成桂) 두 사람이었다. 우 말년에 이인임이 늙어 병이 들자 벼슬에서 물러나고 최영이 대신 정권을 장악했으며, 왕은 그의 딸을 왕비로 맞이했다. 최영은 이인임과 마찬가지로 친원파(親元派) 사람이었으므로 왕 말년 【14년】 에 왕과 모의하여 여러 도(道)의 병력을 불러 모은 뒤 명나라를 공격하기로 결정하고, 최영이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가 되어 왕과 함께 평양으로 출진(出陣)했으며, 조민수(曹敏修)를 좌군도통사(左軍都統使), 이성계를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로 삼아 출병했다. 이성계는 출병이 불가함을 간언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조민수와 함께 군대를 이끌고 압록강 위화도(威化島)에 이르렀을 때 두 장수는 나아가 강을 건너지 않고 함께 임금에게 글을 올려 군대를 철수할 것을 요청했다. 그렇지만 그 요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군대를 이끌고 개경으로 돌아가서, 우선 최영을 잡아 그를 유배시키고, 왕을 강화(江華)로 추방했다. 【후에 둘 다 죽임을 당했다.】 이 때문에 다시 또 후계의 문제가 발생했지만, 결국 조민수의 계책으로 우(禑)의 아들 창(昌) 【이인임의 조카딸인 근비(謹妃)가 낳았다.】 을 맞이하여 옹립했다. 왕은 이때 나이가 고작 9세였다. 그런데 그 후 조민수와 이성계 두 사람의 반목이 심해졌는데, 조정 신하들의 대다수가 이성계와 한 편이었으므로, 이에 편승하여 먼저 조민수의 죄를 물어 그를 유배시켰고, 이어서 왕을 폐위하여 강화로 쫓아내어 평민이 되게 했다. 창이 왕위에 오른 지 고작 1년 만이었다. 이리하여 이성계는 왕씨(王氏)의 종실(宗室)인 요(瑤)를 왕으로 맞이하여 옹립했다. 이미 이성계의 공훈 및 위세와 명망은 그와 어깨를 견줄 만한 사람이 없었으므로, 조준(趙浚), 정도전(鄭道傳), 남은(南誾) 등이 비밀리에 그를 추대하려고 했으며,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인 방원(芳遠)도 역시 여기에 참여했다. 정몽주 등은 이에 반대하여 이성계에게 가담하는 사람들을 제거하려고 했으므로, 방원은 기선(機先)을 제압하여 휘하의 무사인 조영규(趙英珪) 등에게 정몽주를 암살하게 했다. 그 후 4개월 만에 요를 폐위시켜 원주(原州)로 보내고, 이어서 이성계는 많은 사람들에 의해 추대되어, 왕씨 대신 정권을 장악했다. 실로 요가 즉위한 지 4년 7개월 만이었다. 폐왕 요는 이어서 간성(杆城)으로 옮겨졌으며, 다시 삼척(三陟)으로 옮겨 갔지만, 후에 살해되었다. 이조 태종 때 공양왕(恭讓王)이라는 시호가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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