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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 태종(太宗) 및 세종(世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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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합인(勘合印)

세종 때 처음으로 소 사다모리(宗貞盛)에게 도서(圖書) 【인장(印章)으로 일본에서는 보통 감합인(勘合印)이라고 부른다.】 를 발급하여 교류의 증명으로 삼았으며, 또한 일본으로부터 교류를 원하는 사람은 설령 제후(諸侯)라 할지라도 반드시 그 도서를 날인한 증명서를 받지 않으면 안 되었다. 【예외는 비고 2 「쓰시마와의 관계」 참조.】 그 증명서를 다른 말로 문인(文引)이라고 한다. 또 소(宗)씨 외에도 간혹 조선과 특수한 관계로 도서를 받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도 반드시 소(宗)씨의 문인을 받지 않으면 안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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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서 소(宗)씨 및 기타 사람들에게 도서를 발급하는 경우에는, 그 도장을 종이에 찍어서, 예조(禮曹) 전교서(典校署) 및 3포(浦)에 그것을 비치해 두고, 사신 등이 올 경우에 증명서를 대조하여 진위(眞僞)를 검사하는 데 쓰도록 하였다. 앞의 그림은 세종 때 조선에서 소 사다모리(宗貞盛)에게 준 동인(銅印)으로, 사방의 길이가 1치[寸] 5푼[分] 남짓으로, 소(宗)씨 대에는 매번 고쳐 주조하여 보내주었다. 또 단종(端宗) 【제6대】 때 오우치(大內)씨에게 준 적도 있다. 아래 그림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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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도장은 길이가 1치 8푼, 폭이 5푼 남짓 되는 동인(銅印)으로 무게는 43문(匁) 7푼이다. 세로로 “조선국에서 대내전에 내리는 통신의 오른쪽, 경태 4년 7월 일 만들다[朝鮮國賜大內殿通信右符景泰四年七月 日造]”라고 2행으로 새겨져 있다. 【경태(景泰)는 명나라 경제(景帝)의 연호로, 그 4년은 일본 쿄토쿠(享德) 2년, 장군 아시카가 요시마치(足利義政) 시대로, 즉 조선 단종 원년에 해당한다.】 그리고 통신부(通信符)라는 글자는 반으로 잘렸는데, 한쪽은 조선에 남아 있고, 다른 한쪽은 오우치 씨에게 준 것이다. 또 성종(成宗) 【제9대】 5년 【일본 분메이(文明) 6년, 장군 아시카가 요시히사(足利義尙) 때】 에 통신부 10매를 바쿠후(幕府)에 준 적이 있다. 이것은 상아로 만들었으며, 둘레는 4치 5푼, 지름은 1치 5푼로, 한쪽 면에는 전서(篆書)로 조선통신(朝鮮通信)이라는 네 글자를 썼고, 다른 한쪽 면에는 성화 10년 갑오(成化十年甲午)라고 썼으며, 각각에 번호를 매겼다. 【1부터 10까지】 이것은 당시 조선과 교류하는 사람들 가운데 이따금 바쿠후(幕府)의 사자(使者)라고 사칭하는 자가 있어, 진짜 사절과 판별하기 곤란한 경우가 있었으므로, 바쿠후의 요청에 따라 특별히 조선에서 준 것이다. 【『세종실록(世宗實錄)』·『성종실록(成宗實錄)』·『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통문관지(通文館志)』·『인국보기(隣國寶記)』·『조선교통대기(朝鮮交通大紀)』·『취고첩(醉古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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