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대 국사 교과서
  • 일제강점기
  • 심상소학국사보충교재 교수참고서 - 2
  • 2. 태종(太宗) 및 세종(世宗)
  • 비고(備考)
  • 김종서(金宗瑞)

김종서(金宗瑞)

김종서의 자(字)는 국경(國卿)이고, 호(號)는 절재(節齋)이다. 그는 전라남도 순천 사람으로 몸집이 왜소하였지만 지략이 풍부하였다. 태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지방관으로 나갔으며, 좋은 평판을 얻었다. 이때 두만강 연안 지역에 오랫동안 여진인(女眞人)들이 할거하고 있어서 항상 소요가 끊이지 않았다. 세종은 큰 뜻을 품고 여진인들을 몰아내고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땅을 회복하기 위하여 김종서를 발탁하여 함길도 【함경도】 도절제사(都節制使)에 임명하였다. 김종서는 왕에게 재능을 인정받은 것에 감동하여, 마음을 다해 북방의 통치 전략에 임하였지만, 완강한 야인(野人)들에게 여러 차례 패배하였다. 조정의 의견은 이론(異論)이 쏟아져, 통치 전략을 중지하자고 주장하는 사람까지 있었다. 김종서는 조금도 굴하지 않고, 마침내 회령, 경원, 경흥, 종성, 온성, 부령의 6진을 구축하였다. 진(鎭)들은 모두 산에 의거하고 물에 임하는 천연의 험준함을 이용하여, 이 둘이 서로 호응하여 야인의 침입을 방어하였으며, 또한 남쪽의 백성들을 6진으로 이주시켜 영구히 살도록 하였다. 이리하여 북쪽 변경은 비로소 안정되었다. 세종은 일찍이 “비록 과인(寡人)이 있었지만, 만약 종서가 없었다면 이 일을 이룰 수 없었을 것이다. 종서가 있다 할지라도 과인이 없었다면 이 일을 주도할 수 없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김종서는 후에 병조판서(兵曹判書)를 거쳐 문종 때 우의정(右議政)이 되었으며, 고명(顧命)을 받고 어린 임금인 단종(端宗)을 보좌하였다. 이어서 좌의정(左議政)에 올랐다. 김종서는 지략이 풍부하고, 당시 사람들의 눈에는 대호(大虎)와 같았다. 이때 수양대군(首陽大君) 【세조】 은 몰래 다른 뜻을 품고 일을 거행하려고 하면서, 먼저 김종서를 제거할 생각이었다. 수양대군은 친히 김종서의 집으로 가서, 부하인 임예(林藝)로 하여금 기회를 틈타 불시에 그를 내려치도록 하였다. 다음날 김종서는 깨어났지만 수양대군 일파들에게 참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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