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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직(金宗直)

김종직은 경상북도 선산(善山) 사람이다. 자(字)를 계온(季昷)이라고 불렀으며, 호(號)는 점필재(佔畢齋)이다. 신체가 왜소하고, 어려서부터 시를 잘 지었으며, 아직 약관(弱冠)의 나이도 안 되어서 글 솜씨로 크게 이름이 알려졌다. 어세겸(魚世謙)이 일찍이 그의 시를 보고 감탄하면서 칭찬하기를, “나는 그를 위해 채찍을 쥐고 마부를 하더라도 결코 사양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성종은 문학(文學)을 하는 선비 십 수 명을 선발하여 처음으로 경연(經筵)을 개최하였다. 김종직은 그중 가장 뛰어난 사람으로서, 학문과 문장으로는 실로 한 시대의 유학의 종사(宗師)라고 추앙받았다. 그의 문 앞에 와서 가르침을 청하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고 이어졌으며, 유명한 유학자들을 많이 배출하였다.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등은 도학(道學)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김일손(金馹孫), 유호인(兪好仁), 조위(曺偉), 이종준(李宗準), 남효온(南孝溫) 등은 문장으로 널리 알려졌다. 그 외에 관직에 나아가 이름을 떨친 사람들도 대단히 많았다. 성종 23년에 세상을 떠났을 때 그의 나이 62세였다. 문간(文簡)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점필재집(佔畢齋集)』, 『이존론(彛尊錄)』, 『동문수(東文粹)』 등의 저작이 있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연산군 4년 무오년】 유자광(柳子光)의 무고로 이른바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나 김일손, 김굉필 등은 유배되어 참수되었고, 당시의 명사(名士)들이 거의 다 죽임을 당하였다. 죄가 김종직에게 미쳐, 유골을 파내어 참수하였으며, 문집(文集)을 불태웠다. 【「사화」 항목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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