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대 국사 교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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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심상소학국사보충교재 교수참고서 - 2
  • 5. 사화(士禍) 및 붕당(朋黨)
  • 비고(備考)
  • 붕당(朋黨)
  • 원인(遠因)과 근인(近因)

원인(遠因)과 근인(近因)

붕당(朋黨)의 분쟁은 폐왕 연산군 이래 조정의 선비들 사이에 누적되었던 다툼과 배격의 분위기와 왕권의 쇠약으로 싹텄다. 이것이 곧 원인(遠因)이다. 그런데 그 발단은 선조 【제14대】 때에 갑자기 심의겸(沈義謙)과 김효원(金孝元)이 반목하여 발생하였다. 이것이 곧 근인(近因)이다. 심의겸은 명종(明宗)의 외척으로서, 일찍이 이량(李樑)을 제거하고 사림의 화(禍)를 막아 주었으므로 인망(人望)이 있었다. 【본과 비고 3 「외척(外戚)의 전횡과 왕권의 쇠퇴」 참조】 나이가 많은 무리들은 대부분 그의 편이었고, 김효원은 신진(新進)이면서 재간이 있어 젊은 선비들은 모두 그를 추앙하고 따랐다. 처음에 명종 때 심의겸은 사인(舍人)이 되어 공무로 영의정 윤원형의 집에 갔는데, 그의 서재에 많은 침구(寢具)가 있는 것을 보고 그 까닭을 물었는데, 그중 하나는 김효원의 침구라고 하였다. 김효원은 이때 글 솜씨로 이름이 나 있었는데, 심의겸은 그가 권문세가에 드나드는 것을 보고 마음으로 그를 수치스럽게 여겼다. 김효원도 역시 심의겸이 외척의 위세에 의지하는 것을 경멸하여 존중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두 사람은 싫어하며 멀어졌다. 이 때문에 두 사람을 편드는 선비들도 역시 이편과 저편으로 나뉘어 서로 협력하지 않았으며, 마침내 당파가 나뉘는 형세를 보이게 되었다. 이때 김효원의 집은 도성 안의 동쪽에 있었고 심의겸의 집은 서쪽에 있었으므로, 전자(前者)에 치우치는 사람들을 동인(東人)이라고 불렀고 후자(後者)에 치우치는 사람들을 서인(西人)이라고 불러, 동당(東黨)과 서당(西黨)이라는 명칭이 시작되었다. 이는 선조 8년의 일이다. 이때 부제학(副提學) 이이(李珥)는 분당(分黨)의 폐해를 크게 염려하여 그들을 조정하려고 시도하였지만 효과를 거두지는 못하여, 당시 선비들은 동·서 어느 당에든 가입하지 않은 사람이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선조 17년에 이이가 세상을 떠나게 되어 동·서의 조정에 대한 기대는 완전히 끊어졌다. 이와 같이 붕당은 개인적인 감정의 충돌에서 기인한 것으로, 오늘날의 정당처럼 정치적 의견의 차이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며, 따라서 그 목적은 단순히 권력의 농단에 있었고, 국가를 잘 다스리는 이상적인 정치를 실현하려는 데 있지 않았다. 국가의 번영은 오히려 당쟁(黨爭)의 희생양이 되는 상태에 있었다는 것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아래에서 각 당(黨)의 성쇠(盛衰)를 개략적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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