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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쿠가와 이에야스 시대의 조선통신사(朝鮮通信使)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조선에 대해 화친과 수교에 마음을 기울였다는 것은 전 항에서 상술한 바와 같다. 그리하여 조선과 우리의 국교가 옛날로 돌아갔으므로, 새로운 쇼군이 직위를 물려받는 【나라가 창성하고 태평함을 축하하거나 혹은 세자가 출생한 것을 경축하는 등 한두 가지 예외가 있었다.】 때에는 쓰시마에서 그 사실을 조선에 통지하고, 조선에서는 반드시 사절을 파견하여 경하(敬賀)의 뜻을 표시하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그러므로 후세에 조선통신사(朝鮮通信使)는 쇼군 직위를 계승하는 데 따른 하나의 성대한 의식으로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게이죠(慶長) 12년 이후 조정에 온 통신사는 다음과 같다.

 (1) 게이죠 12년 【선조 40년 정미(丁未)】

   목적 수교

     에도성(江戶城)에서 쇼군 히데타다(秀忠)를, 슨푸(駿府)에서 이에야스(家康)을 알현하였다.

   정사(正使) 여우길(呂祐吉), 부사(副使) 경섬(慶暹), 종사관(從事官) 정호관(丁好寬).

 (2) 겐나(元和) 3년 【광해군 9년 정사(丁巳)】

   목적 도요토미(豐臣) 씨를 멸망시키고 국내를 통일한 것을 경하하였다.

     후시미성(伏見城)에서 쇼군 히데타다를 알현하였다.

   정사 오윤겸(吳允謙), 부사 박재(朴榟), 종사관 이경직(李景稷).

 (3) 간에이(寬永) 원년 【인조 2년 갑자(甲子)】

   목적 3대 쇼군 이에미츠(家光)의 직위 승계를 경하하였다.

     에도성에서 이에미츠를 알현하였다.

   정사 정립(鄭岦), 부사 강홍중(姜弘重), 종사관 신계영(辛啓榮).

 (4) 간에이 13년 【인조 14년 병자(丙子)】

   목적 나라가 창성하고 태평함을 경하하였다.

     에도성에서 이에미츠를 알현하였다. 【이때 처음으로】 닛코뵤(日光廟)에 참배하였다. 그 이후 관례가 되었다.

   정사 임광(任絖), 부사 김세렴(金世濂), 종사관 황호(黃㦿).

 (5) 간에이 20년 【인조 21년 계미(癸未)】

   목적 쇼군 이에미츠의 세자(世子) 이에츠나(家綱)의 탄생을 경하하였다.

     에도성에서 이에미츠를 알현하였으며, 마지막에 닛코뵤를 참배하였다.

   정사 윤순지(尹順之), 부사 조경(趙絅), 종사관 신유(申濡).

 (6) 메이레키(明曆) 원년 【효종 6년 을미(乙未)】

   목적 4대 쇼군 이에츠나의 직위 승계를 경하하였다.

     에도성에서 쇼군을 알현하고, 마지막에 닛코뵤를 참배하였다. 【닛코뵤 참배는 이후로는 중지하였다.】

   정사 조형(趙珩), 부사 유창(兪瑒), 종사관 남용익(南龍翼).

 (7) 텐호(天和) 2년 【숙종 8년 임술(壬戌)】

   목적 5대 쇼군 츠나요시(綱吉)의 직위 승계를 경하하였다.

     에도성에서 쇼군을 알현하였다.

   정사 윤지완(尹趾完), 부사 이언강(李彦綱), 종사관 박경준(朴慶俊).

 (8) 쇼토쿠(正德) 원년 【숙종 37년 신묘(辛卯)】

   목적 6대 쇼군 이에노부(家宣)의 직위 승계를 경하하였다.

     에도성에서 쇼군을 알현하였다.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의 건의에 따라 그들의 대우를 고쳤다.】

   정사 조태억(趙泰億), 부사 임수간(任守幹), 종사관 이방언(李邦彦).

 (9) 쿄호(享保) 4년 【숙종 45년 을해(乙亥)】

   목적 8대 쇼군 요시무네(吉宗)의 직위 승계를 경하하였다.

     에도성에서 쇼군을 알현하였다.

   정사 홍치중(洪致中), 부사 황준(黃璿), 종사관 이명언(李明彦).

 (10) 칸엔(寬延) 원년 【영조 24년 무진(戊辰)】

   목적 9대 쇼군 이에시게(家重)의 직위 승계를 경하하였다.

     에도성에서 쇼군을 알현하였다.

   정사 홍계희(洪啓禧), 부사 남태기(南泰耆), 종사관 조명채(曹命采).

 (11) 호레키(寶曆) 13년 【영조 39년 계미(癸未)】

   목적 10대 쇼군 이에하루(家治)의 직위 승계를 경하하였다.

     에도성에서 쇼군을 알현하였다.

  정사 조엄(趙曮), 부사 이인배(李仁培), 종사관 김상익(金相翊).

 (12) 분카(文化) 8년 【순조 11년 신미(辛未)】

   목적 11대 쇼군 이에나리(家齊)의 직위 승계를 경하하였다.

     쓰시마(對馬)에서 응접하였다. 대개 종래의 조선 사절 일행에 대한 접대에는 매우 많은 비용이 필요한데 이에나리 쇼군의 취임 초기에 텐메이(天明) 연도의 대기근 등으로 인해 장소를 바꾸어 교섭한 결과이다.

   정사 김이교(金履喬), 부사 이면구(李勉求) 【종사관은 없음】

즉 조선에서 사절을 도쿠가와 바쿠후(幕府)에 파견한 것은 모두 12번이었는데 각 대(代)를 통틀어 방문의 의식과 가고 오는 경로는 거의 동일하였다. 여기서는 그 대략적으로 기록하고자 한다. 정사(正使)가 사신 일행을 인솔하고, 부사(副使)와 종사관(從事官) 등은 보좌역이었다. 일행의 인원수는 많을 때는 5백 명, 적을 때도 2백 7, 8십 명을 내려가지는 않았다. 정사는 파견의 명을 받으면 부하들을 독려하여 밤낮없이 준비를 갖춘 다음, 국왕으로부터 국서(國書)와 특산품을 받고 경성을 출발하여 부산에 도착하여 여기에서부터 배를 타고 날씨가 맑은 날 먼저 쓰시마로 건너갔다. 쓰시마의 영주(領主)인 소(宗) 씨는 일행을 맞이하고 선도하며 일행은 이끼(壹岐)를 거쳐 큐슈의 북쪽 해안을 지나 세토(瀨戶)의 안쪽 바다로 들어가서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하면서 오사카(大阪)에 상륙하여 순서대로 에도(江戶)로 향한다. 이에 앞서, 바쿠후는 조선에서 통신사가 왔다는 보고를 접하면, 특별히 연도의 여러 번(藩)에 명하여 역로(驛路)를 수리하고 숙소를 설치하는 등의 일들을 하게 하였고, 녹봉을 많이 받는 사람은 말을 징발하고 품삯을 부담하게 하였다. 또 조선의 사절 일행이 통과할 때에는 맞이하거나 전송하도록 하였으며, 특히 단속을 엄중히 하여 무례를 가하지 않도록 하였다. 에도에서는 큰 번(藩)의 제후나 로쥬(老中)를 접대봉행(接待奉行)에 임명하고, 시바(芝)의 혼세이지(本誓寺) 【쇼토쿠(正德) 이후에는 아사쿠사(淺草)의 히가시혼간지(東本願寺) 별원(別院)으로 바꾸었다.】 를 숙소로 제공하여, 제반 준비가 완료되기를 기다렸다가 날짜를 정하여 쇼군을 알현하는 식을 거행하였다.

식은 가장 엄숙한 가운데 진행하였다. 이날 쇼군은 화려하게 차려입은 수많은 다이묘(大名)와 중신(重臣)들을 따라 혼마루(本丸)의 대연회장 【大廣間】 으로 나온다. 조선의 삼사(三使) 【정사·부사·종사관】 는 안내역에게 인도되어 쇼군을 알현하고 국서를 바친 후 일단 다음 칸으로 물러나 앉는다. 쇼군은 다시 별실에 진열되어 있는, 조선에서 헌상한 특산품들을 둘러보고 이어서 대연회장에서 다시 삼사를 알현하고 식을 마친다. 곧 사절은 쇼군이 보낸 사람에게 먼 길을 와서 큰 의식을 치른 뜻을 전달받으며, 술과 음식을 대접 받고서 성을 물러나온다. 일행은 에도에 체류하는 동안에 여러 차례 로쥬나 여러 다이묘들로부터 정중한 대접을 받는다. 노가쿠(能樂), 사루가쿠(猿樂) 등을 관람하면서 여정(旅情)을 달래는 것이 보통이다. 또는 여가를 이용하여 각 곳들을 관람하기도 한다. 또는 우리 학자들과 아회(雅會)를 열어 시문(詩文)을 주고받는 경우도 있다. 일행은 또다시 기회를 얻어 시모노국(下野國)의 닛코뵤(日光廟)를 참배한다. 【닛코의 참배는 간에이(寬永) 13년에 시작되어 텐호(天和) 2년 이후에는 하지 않았다.】 현재 닛코에는 아직도 조선에서 헌상한 국왕 친필의 편액(扁額), 금등롱(金燈籠), 화병(花甁) 등이 보존되어 있다. 이리하여 통신사는 쇼군의 답서와 하사품을 받고, 로쥬 이하 여러 사람들과 작별의 예를 마치고 에도를 떠나 귀로에 오른다. 쓰시마에 도착할 때까지 소(宗) 씨가 사절을 수행하는 것은 갈 때와 다름이 없다. 무사히 경성에 도착한 뒤 국왕에게 자세히 보고하고 임무를 마친다.

조선 통신사가 조정에 오는 것은 조선과 우리나라[일본] 사이의 친밀한 교의를 표명하는 것이므로, 도쿠가와 시대에 가장 성대한 행사의 하나였다. 그런데 바쿠후 초창기에는 조선에서 답신이나 사신 방문에 관한 의식 등도 충분히 강구되어 있지 않았지만 태평이 유지되었고, 모든 일들이 순서에 따라 점차 완벽해지게 되었다. 그렇지만 통신사 일행은 수백 명이 넘고 행렬도 쓸데없이 요란스러운 데다 바다와 육지를 수백 리나 왕복하며 날짜도 약 반 년이나 걸렸으므로, 우리나라[일본]는 설비의 촉박함과 접대의 번거로움에 날짜도 부족하였고 쓸데없는 노력과 경비를 지나치게 소모하였다.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는 일찍부터 이에 착안하여 바쿠후 정치가 시작되는 국면에 처하자 마침내 이를 개혁하려고 하였다. 그는 쇼토쿠(正德) 연간인 쇼군 이에노부(家宣) 때 우선 의식(儀式)을 요견(遙見), 사향(賜享), 사견(辭見)의 세 가지로 나누어, 종전에 비해 통신사의 예우(禮遇)를 점차 낮추었다. 게다가 그는 오히려 한 걸음 더 나아가 일행을 쓰시마에서 영접하고, 우리나라[일본]에서는 코케(高家) 두 사람을 특별히 파견하여 국서 및 특산품을 교환하게 할 것을 건의하였다.

때마침 이에노부 쇼군이 세상을 떠나고 요시무네(吉宗)가 뒤를 이었다. 새로운 쇼군은 성실히 옛 관습과 옛 관례에 따르려고 하였으므로 하쿠세키의 개혁안은 실행되지 못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 후 70년이 지나 11대 쇼군 이에나리(家齊)가 직위를 승계하였을 때는 조선에 교섭하여 그 사절을 쓰시마의 경계에서 맞이하는 것으로써 빙례(聘禮)의 의의를 다하였다. 실로 분카(文化) 8년 7월의 일이었다. 12대 이에요시(家慶) 이후에는 바쿠후도 말기에 가까워져 국내가 점차 복잡다단해졌으므로 쓰시마에서의 빙례도 중지되고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후에 이르기까지 양국은 사절을 파견한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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