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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괄(李适)

이괄(李适)은 참판 이육(李陸)의 후손이다. 【이육은 호가 청파거사(靑坡居士)이며, 성종(成宗) 때 사람으로 대사헌과 호조·병조 참판을 지냈으며, 저서로는 『청파극담(靑坡劇談)』이 있다.】 무과(武科) 출신이었지만 글에도 능숙하였으며 또한 글씨를 잘 써서 유명하였다. 이귀, 김류 등이 광해군을 폐위하고 인조(仁祖)를 맞이하려고 할 때, 이괄은 북병사(北兵使) 【함경도】 로서 아직 임지로 가지 않았는데, 이귀 등은 이괄이 재주와 슬기가 있다는 것을 알고, 광해군을 폐위하려는 계획을 알리고 비밀리에 계책을 세우게 하였다. 이에 이괄은 곧바로 응하여 계략을 세운 바가 적지 않았고 이귀 등은 공을 세우는 데 이괄의 부서에 의지한 바가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인조가 즉위하여 공신들의 훈등(勳等)을 논의하였는데 이괄을 2등에 올렸으므로 이괄은 크게 불만을 가졌다. 이 해 5월에 왕은 장만(張晩)을 도원수(都元帥)로 삼고 이괄을 평안병사(平安兵使) 겸 부원수(副元帥)로 삼았다. 이괄은 더욱 분노하였으며 마침내 다른 뜻을 품게 되었다. 이때 원수는 부(府)를 평양에 개설하였고 부원수는 부를 영변(寧邊)에 개설하였지만, 이괄은 원래 명망이 높았으며, 갑병(甲兵) 수만 명은 그에게 예속된 가장 정예군이라고 일컬어졌다. 인조 2년 정월에 이괄 및 그의 아들 전(旃)과 순변사(巡邊使) 한명련(韓明璉) 등의 모반을 고발한 자가 있었다. 왕은 이에 선전관(宣傳官) 및 도사(都事)를 파견하여 우선 이괄의 아들 전과 한명련을 사로잡았지만, 이괄은 마침내 도사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으며, 한명련도 역시 그를 따라 일어났다. 이때 도원수 장만은 평양에 있었는데 여러 읍(邑)에 명령을 전해, 병사들을 급히 평양으로 오게 하여 평양을 고수할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같은 달 22일에 이괄의 병사들은 영변을 출발하여 지름길을 따라 개천(价川) 【평안남도】 으로 향하여 멀리 적을 공격해 갔다. 장만은 전체 병력 1800여 명으로 평양을 출발하여 이괄의 군대와 황주(黃州) 땅에서 싸웠지만 이길 수 없었다. 2월 6일에 이괄의 군대가 진격하여 저탄(猪灘)에 이르자, 관군은 그들을 막지 못하였고, 관군이 패하였다는 보고가 도성에 도달하자 모든 조정은 깜짝 놀랐다. 8일에 이괄의 군대는 벽제(碧蹄)에 이르렀다는 보고가 있었다. 왕은 황급히 도성을 나와 공주(公州)로 달아났으므로, 10일에 이괄은 성 안으로 들어가 경복궁의 옛터에 진을 치고, 선조(宣祖)의 열째 아들인 흥안군(興安君) 제(瑅)를 왕으로 삼았다. 이때 장만은 파주에 있었는데 왕이 남쪽으로 천도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군대를 진격하여 경성을 공격하였다. 이괄은 결국 크게 패하고 11일 밤에 수백 명의 기병을 이끌고 수구문(水口門)으로 도망쳐 이천(利川) 【경기도】 에 이르렀지만, 아들 전(旃)과 함께 한명련 등은 모두 부하 장수인 기익헌(奇益獻), 이수백(李守白) 등에게 살해되었다. 이때가 인조 2년 2월 12일이다. 【『일월록(日月錄)』·『조야첨재(朝野僉載)』·『연려실기(燃藜室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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